사랑니를 뺐다. 몇 년 전부터 왼쪽 아래 어금니 뒤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너무 커서 아무도 빼자고 덤벼들지 않았던 녀석이다. 그냥 그대로 평생 매복해 있었으면 별 문제 없었는데 최근 들어 슬금슬금 잇몸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아프진 않았어도 불편함이 극에 이른데다 복직하면 더 시간이 없겠다 싶어서 과감히 빼기로 했다. 동네 치과에 갔더니 쉽지 않겠다며 큰병원을 추천했지만 괜찮으니 그냥 빼달라고 부탁했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시간도 한정적인데 어느 세월에 큰 병원가서 예약을 하고 기다리겠냐는 심산이었다. 다행히 별 탈없이 뽑았고 다니는 김에 충치 치료도 했다. 처음에는 꺼려하던 의사도 복직 전에 사랑니를 뺀 건 잘한 일이라 했다.
아기 돌이 지나면 며칠후 복직해야 하기 때문에 신경써야 할 것들이 꽤 많았다. 가족끼리 작게 돌잔치를 하기로 했지만 식사 장소를 알아보고 스튜디오 촬영에 돌상, 의상과 당일 스냅촬영까지 신경써야 할 건 돌잔치를 크게 하든 작게 하든 똑같았다. 그 와중에 회사에 연락해서 복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가능하면 육아에 집중할 수 있는 부서로의 배치를 사정했다. 가능하면 아기를 어린이집에서 빨리 데리고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그사이 아기는 감기가 다 나아가는가 싶더니, 또 울고 보채 소아과에 데려갔더니 배가 부글부글하단다. 아직도 하루에 분유를 5번이나 먹는다 했더니 너무 많이 먹는다며 당장 줄여야 한다는 거다. 아직 이가 별로 없어서 음식을 잘 못 씹는다 했더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금이라면 잇몸으로 씹어 삼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줘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집에 와서 진밥을 주면 아기는 웩 하며 전부 뱉어내 버리기 일쑤였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내가 복직하고 상황이 바뀌면 스트레스 받아 더 빨고 싶어할텐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했다.
복직은 예정되어 있는 일이니 더 이상 손 쓸 방법은 없지만, 막상 갓 돌 지난 아기를 두고 회사에 출근할 생각을 하니 이래저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과연 회사에서 일찍 퇴근해야 하는 나의 사정을 이해해줄지, 괜히 안좋게보이는 건 아닐지 걱정하면서도, 나는 이제 엄마이고 아기를 위해 일찍 퇴근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과 생각까지 고려하긴 벅차니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자고 수시로 다짐을 해야했다. 걱정을 할 시간에 차라리 아기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릴 대책을 세워야했다. 먼저 저녁에 아기와 보낼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위해 전화영어를 당분간 그만하기로 했고, 급한 일이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아기와 남편과 셋이 저녁시간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평일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주말에 유아식 등을 미리 구비해두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뿐 실제상황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그때 가봐야 새 사이클의 윤곽이 나오겠지. 갑자기 바뀔 생활 사이클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버겁겠지만, 무엇보다 아기가 잘 따라와 주었으면 싶었다.
어릴 적 막연하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겠지'라고 생각할 때에는, 아기와 36개월은 무조건 같이 있어줄 거라고 다짐했었다. 만 3세까지가 아기의 두뇌와 성장이 급격하게 발달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만 3세가 될때까지 내 아기에게 책도 많이 읽어주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음악도 많이 들려주고,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아서 두뇌 발달을 건강하게 해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엄마가 되고보니 생각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이렇게 일과 은행 이자의 노예가 될 줄도 몰랐고, 아기를 돌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한 일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무리 마음을 달래보아도 자꾸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집안 문제로 남편과 대립할 일이 또 발생했는데, 평소 같으면 피곤하고 싸우기 귀찮아서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마음에 분노가 쌓였다. 이 정도의 분노 게이지에서 예전의 나라면 버럭 화를 내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기가 보지 않는 곳에서 싸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화를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다스리고 문제를 극복해 나갈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나는 최대한의 분노를 죽이고 남편에게 차분히 나의 심정을 설명했다. 우리 둘 사이의 대립은 대부분 우리 둘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 문제였기 때문에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말을 해줘야 남편이 이해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워낙에 눈치도 없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심리 매커니즘도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상황을 다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기억 나? 예전의 나라면 이런 식으로 절대 차분하게 얘기하지 않았을거야. 소리치며 화를 못 이겨 울기도 했겠지. 이렇게 나의 감정을 조절하게 만드는 건 전부 우리 아기야. 어렸을 적 우리 엄마 아빠는 우리 앞에서 너무 많이 싸워서 그때 다짐을 한 게, 나는 절대 아이 앞에서 큰 소리 내며 싸우지 않겠다 생각했지. 이제 나는 절대 당신하고 악감정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거야.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당신도 이런 내 다짐을 알아줬으면 좋겠고, 향후 이런 문제가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줘."
남편은 예전 우리가 싸우던 양상을 기억하고는,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와중에도 거실에서 즐거운 듯 웃으며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이렇게 엄마 아빠의 반응양상을 전환시키고 있었다.
나에게는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두어 명 있다.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하건 아니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겸손해진다.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내게 늘 더 나은 반응에 대해 고찰할 기회를 준다. 이번처럼 화가 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까?'라고 생각하게 해준다고나 할까. 그런 시간을 갖고 나면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기분이 들고, 좀 더 현명한 반응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내 아이에게도 나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만큼은 내 아이에게 타산지석의 본보기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우리 엄마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를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아이는 앞으로 살면서 화가 나는 상황에도 부딪힐거고 부당한 상황에도 부딪힐텐데, 거기에 매번 일희일비하여 감정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반응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나니, 아이가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은 맞지만, 본보기가 될만한 인격을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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