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내 꿈은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때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용돈이 생기면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새로 나온 애니메이션 CD, 화보 등을 사 모았고 월간 발행되던 애니메이션 전문잡지 Newtype을 구독해보는게 그 시절 최대의 낙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DVD가 상용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보았고 공테이프를 사서 TV에서 방영하던 모든 애니메이션을 녹화해봤다. 방 한쪽 책꽂이에는 녹화해놓은 애니메이션이 종류 및 날짜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는데, 매일 정렬법을 달리하여 정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애니메이션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했는데 애니메이션 고교에 가고 싶다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부모님은 일반고를 고집했고, 취직이 비교적 수월한 이과를 선택하라 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뜻을 따랐고 그 이후 내 꿈에 대한 생각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기억 속에서 더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그 이후의 내 삶은 보통의 삶으로 점철되었다. 공부를 뚜렷하게 잘하지도 못했으니 보통의 학교에 진학하였고 보통의 회사에 들어가 보통의 인생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항상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특별해보였다. 마음이 아니꼬운 날엔 그들이 생계유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르주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그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의지가 대단해보였고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정열이 부러웠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 몇 번에 굴복될 정도로, 애니메이션 감독에 대한 나의 의지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갈망은 계속 커졌다. 내게 있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의 기준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이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다. 애니메이션 감독에 대한 내 별 볼일 없는 의지와는 별개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던 것 만큼은 사실인데, 무엇을 해도 그만큼 푹 빠져들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첫사랑의 애틋하고 풋풋했던 기억을 못 잊어 다시 만났을 때, 그때는 이미 예전의 감정이 아닌 것과 비슷했다. 오히려 내가 왜 이것들에 푹 빠져있었을까 하고 의아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꼭 예전만큼 푹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 어릴 때는 아무것도 신경 쓸게 없었으니 모든 정열을 거기에 올인할 수 있었잖아.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100으로 봤을 때 예전이라면 100 전부를 거기에 쏟아부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에너지를 분산해야 하는 삶이니 예전처럼 100만큼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20만큼만 좋아하더라도, 어쨌든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 굳이 100이 될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20만을 믿고 바라보며 집중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20만큼의 에너지를 좋아하는 무언가에 남겨놓는다는 것도 크게 본 거다. 아침에 일어나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이유식 만들고 간식 만들고, 다시 데려와 간식 먹이고 놀아주고 저녁 먹이고 재우는 요즘의 삶엔 100은 커녕 120의 에너지도 부족하다. 어째서 아직도 보편적으로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일을 얕잡아보는지 모를일이다.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것이 훨씬 쉽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에 대한 기준에 새로운 관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집안일을 하고 아기를 돌보는 일에서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중요하다는 건 자명하다. 게다가 하면 할수록 이 일에서 가치를 느끼고 좋아지고 있다. 생전 안 해보던 살림이라 처음엔 스트레스를 받았고, 아기 이유식 메뉴를 생각할 때마다 압박감을 받았지만 이제는 좀 더 집안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싶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딸기를 주면 아기가 좋아할까, 블루베리는 어떨까 하고 고민하는게 즐겁기까지 하다. 아기가 잘 먹으면 즐겁고 매일 커가는 모습을 보는게 좋다. 이제 내게 있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란, 돈이 벌리냐 마느냐를 떠나서 그것을 할 때 온전히 즐거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에서 저자 사이토 시게타는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굳이 젊은 시절부터 달려들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요즘같은 100세 시대는 정년 이후에도 긴 삶이 보장되기 때문에 퇴직 후 좋아하는 일을 해도 충분하다는 거다.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고, 괴테도 그랬고, 주변 지인들도 그랬듯이 인생의 전반기에는 생계보장이 되는 일을 하며 삶의 기반을 마련해 놓은 후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좋아하는 일을 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에이 뭐 이런 주장이 다 있어, 사람이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안다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별 탈이 없는 한 내 인생도 이렇게 흘러갈 것 같아서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나중에 보니 이 책의 원제는 '50대부터 인생을 즐기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을 아이에게만큼은 끝까지 유지시켜주고 싶다. 취직 때문에, 생계유지 때문에 그 마음을 접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언제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내 부모님은 비록 그랬을지라도, 그리고 지금와서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나만큼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만큼 강력한 믿음을 주고도 싶다.
솔선수범이 따르지 않는 충고는 힘이 없기 때문에, 나부터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조금은 느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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