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아기와 함께 한 첫 1년

체력

gowooni1 2018. 11. 29. 10:34




친한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오랜만에 동기들을 만났다. 동기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유식은 어떻게 하는지, 밥은 잘 먹는지, 아기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인지 등등. 아직 아기가 없는 친구들은 별로 호응이 없었지만 나같은 당사자들에게는 이게 정말 큰 문제였다. 비교 대상을 찾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별로 흔치 않을뿐더러 만약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기를 낳은 후 배우자와의 사이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갔는데, 남자 동기 한 명은 아기를 키우면서 아내와 유독 많이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예전처럼 좋은 관계로 돌아가려 노력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듯 했다.

"누나는 아기 키우면서 남편이랑 안 싸워?"

나는 가만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우리는 거의 싸우지 않는 것 같은데."

"아니 어떻게 안 싸울 수 있지? 우리는 모든 일에서 부딪혀서 미치겠어."

그렇게 말하고보니 나도 궁금했다. 왜 우리가 싸우지 않게 되었더라? 정답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체력이 없어서 못 싸워. 정확히 말하자면 싸울 기운이 없어서 못 싸우는거야."


아기가 생기기 전에는 종종 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많이 싸워두길 잘 한 것 같다. 그때 열심히 부딪히면서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관을 파악하고 고슴도치처럼 찔리지 않을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확보해 놓았다고나 할까. 만약 그때 하나도 싸우지 않았다가 아기를 키우면서 싸웠더라면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상대방의 가시에 찔려 유혈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엄마 아빠가 되기에 제법 높은 연령대에 속했고 운동이라고는 겨울철 스키 타러 몇 번 다니는 게 전부라 체력이 늘 바닥이었으므로 아기를 케어하는 일 외에는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할 수 없었다.


체력을 아껴둬야 하는 일은 생활 곳곳에서 발생한다. 특히 아기가 아플 때는 더욱 그렇다. 처음으로 아기가 열이 나고 아플 때에는 너무 속상해서 마음으로 같이 아파했는데 그러다 결국 나도 감기가 덜컥 옮았다. 둘이 같이 아프니 이건 정말이지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었다. 시간마다 아기 열 체크해 해열제는 먹여야하지, 기침 하면서 토하니 옷도 자주 갈아 입혀야지, 목이 아파 잘 못 먹으니 신생아 때처럼 우유를 조금씩 자주 먹여야지, 아파 보채니 많이 안아 줘야지, 거기다 빨래도 많아지고 젖병 설거지감도 많아지니 빨리 해두지 않으면 입힐 옷이 부족하고 다음 번 우유를 먹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나까지 아파 컨디션이 말이 아니니,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머리가 핑 돌고 하늘이 노래지며 아기를 안은 허리는 밤새 아파 끙끙거렸다.


이후로 작은 교훈을 얻은 나는 늘 체력을 충전상태로 유지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길임을 알았다. 밥 챙겨먹는게 귀찮더라도 잘 먹어두는게 중요했다. 아기를 보다 허기가 진다고 해서 그때 그때 무언가를 먹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술 마신 다음 날의 피로가 부담으로 다가오니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 한 캔, 와인 한 잔과도 점점 멀어졌다. 알코올을 해독하는 데 쓰일 에너지는 내게 엄청난 사치였다. 그럴 에너지가 있으면 아기에게 말 한 번 더 걸어주는 편이 백 번 나았다.


엄마의 에너지 상태가 아기의 언어 발달에 상당히 중요하는 걸 느낀 계기는 어린이집 학부모 상담을 할 때였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거의 콧물을 달고 산 아기 덕분에 나 역시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그러다보니 목이 쉽게 부어서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어머니, 아기에게 말 많이 걸어주셔야 해요. 그래야 애들이 말문이 빨리 트여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앞뒤 문맥 없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우리 아기가 다른 아기들에 비해 말이 좀 느리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목이 부어 2주에 한 번 꼴로 찾아가는 내과에서는 늘.

"아기를 보기 때문에 어렵긴 하겠지만 말을 많이 하시면 안돼요. 전화 통화도 가능한 한 삼가시고요."

라고 하니 이건 정말 이도 저도 못하는 꼴이었다. 정답은 결국 내가 아프면 안 된다는 거다. 


지난 주말부터 며칠간 아기가 또 한 번 아팠다. 처음 2~3일간은 열이 나서 끙끙 앓더니 이후엔 기침과 콧물 가래로 고생을 했다. 아기가 아파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났지만, 이제 마냥 함께 아파할 수는 없었다. 아기를 케어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아프면 안 된다. 오히려 밥도 더 잘 챙겨먹고, 각종 영양제와 비타민을 챙겨먹으면서 버텼다. 이번엔 다행히도 아기가 한고비를 넘기고 나서 내가 병원신세를 졌는데, 신기하게도 내 증상이 아기의 증상과 닮아있었다. 목이 붓고 콧물이 나며 중이염이 왔다. 중이염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번에 아파보고 나니 아기가 그간 중이염을 앓을 때마다 얼마나 아팠을지 감이 왔다. 불쌍하기도 하지. 아기는 며칠 아프고 나더니 볼살이 쪽 빠져서 유아 느낌이 물씬 나기 시작했다. 너도 세상에 적응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어서 체력을 키워 다시 건강해지자, 라고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해왔지만, 적어도 체력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20대 엄마 아빠를 절대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거 참, 아기랑 같이 놀아주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체력 증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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