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아기와 함께 한 첫 1년

무엇보다 건강

gowooni1 2018. 11. 19. 14:10

4년 전 한 달 정도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병명은 급성 독성 간염. 바이러스성도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었고 현재는 완쾌하여 X-ray 상에 흔적도 없어 의사들도 모를 정도다. 그러나 그때는 상태가 꽤나 심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간 수치가 쭉쭉 올라갔고, 의사는 이 상태라면 병원을 옮겨 생체 간이식을 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구상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유전자 조합을 가지고 있을 동생이 캐나다에 있는 바람에, 동생은 급히 비행기표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다행히 2주간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던 간수치는 1750이라는 어마어마한 정점(보통은 40 이내이며 나의 경우는 18~20 정도)을 찍고 매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정신이 끝도 없이 땅으로 꺼지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 '이제 살 수 있을 것 같아'하고 예감을 할 수 있었던 건, 어느 날 새벽 눈을 떴을 때 포카리 스웨트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이 나쁘면 보통 기운과 식욕이 없어지므로 그 당시 한 달 넘게 식욕이 없던 상태였는데, 처음으로 식욕이란 것이 생겼던 거다. 급히 병원 자판기에서 포카리 스웨트를 한 캔 사 벌컥벌컥 마시며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를 했다. 다시 이런 식욕을 생기게 해주어서 감사하고, 또 다시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세상 만물에 감사했다. 그 날을 기점으로 간 수치는 조금씩 떨어졌고, 1~2주 후 무사히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내가 그 상태가 된다면 이제 무서울 것이다. 그때는 혼자였고 잃을 것이 없어 두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의사가 매일 아침 염려스러움을 감추며 새롭게 갱신하는 간수치를 말해 줄 때도 무덤덤했다. 죽을 거라고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이러다 죽으면 이게 내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아프면 아기와 남편의 삶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미친다. 저질 체력을 증빙이라도 하듯 지난 달에는 몸살로 두 번이나 병원 링겔 신세를 지고 말았는데, 그 때마다 아기 돌보기도 불가능하고 그러다보니 남편도 덩달아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저질 체력으로 버티는 것도 부족하고, 아기를 위해서라도 체력을 좀 키워놓지 않으면 앞으로 점점 힘들어지겠다 싶었다. 물론 나도 인간이니까 언젠가는 당연히 죽겠지만, 이제 그것을 최대한, 건강한 상태로 유보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 모처럼 지인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조금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한때 같은 팀이라 꽤 가깝게 알고 지내던 선배의 아내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원래 지병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완치되었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그 분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나이인데... 젊은 나이에 상처한 선배가 몹시 안쓰러웠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아픈 건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그들의 아이들 때문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이 계속 좋지 않았다.


이러한 복합적 상황을 계기로 부모로서의 책임에 건강과 웰다잉이 포함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살던 때가 지났다는 건 이미 자각하고 있었지만, 아이를 위해서 건강해야 하고,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잘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세상에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무턱대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달라고 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여러가지 경험을 해 볼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이 모든 기회를 기쁨이라 느끼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마주할 수많은 책임감에 너무 짓눌리지 않기를 바란다. 짓누르는 책임감을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와 유머를 지녔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책임감을 완수하면서 따라올 보람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거기에 나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책임감의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다. 역시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얼마 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종료한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처럼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마음가짐을 해 놓는 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에 중요한 건 어쨌든 건강이다. 웰다잉도 건강하고 나서 볼일이니까. 일단 건강해야 아기도 잘 돌볼 수 있고 밥도 잘 챙겨줄 수 있고 여행도 많이 갈 수 있고 좋은 추억도 많이 남겨줄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부모로서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인 셈이다. 얼마 전 마흔 중반의 나이로 부모가 된 지인 부부는 내게 또 다른 감격을 안겨주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어렵게 부모가 되었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서 평소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식을 챙겨먹고 좋은 생활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이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 마흔 중반에 임신을 하고 주수를 다 채워 건강한 아이를 낳은 걸 보니, 그들이야말로 부모가 되기 위해 가장 오래 준비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그 노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기에 그들의 득녀소식이 무엇보다 훨씬 감격스럽다. 아직 그 부부들만큼은 못 미치지만 나도 당장 건강식을 먹으려 노력하고, 조금 더 걸으려 시간을 내다보면 건강한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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