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아기와 함께 한 첫 1년

청소

gowooni1 2018. 11. 13. 10:29



분명 행복한 것 같은데 심심하다. 삶에 재미라는 요소가 사라진 기분이다. 해야 할 일은 많아서 그것들을 해치우기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들을 하면서도 그리고 하고 나서도 심심한 건 어쩔수가 없다.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이유를 알아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하던 인간인데 지금 이 삶에서는 여행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아이를 낳으면 당분간은 정착민이 되어 아이를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모로 마음 수행을 하고 있는데, 수행의 핵심을 전반적으로 요약하자면 인내심의 극대화일 것이다.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것을 당분간 견뎌야 할 때는 어쩐지 마음 비우기 수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마음 비우기 수행을 한다는 기분에 폭 빠질 때는 어쩐지 수련승이 된 것 같다. 온 몸과 마음을 정갈하고 소박하게 단장하고 마당에 나가 비질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비질 한 차례에 욕심이 사라지고, 비질 두 차례에 두 눈이 맑아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내는 수련. 그리고 역시 그 기분을 만끽하려면 청소가 제격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사실 청소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학창시절 청소시간에는 맨날 땡땡이를 쳤고, 기숙사에 살땐 룸메이트에게 욕 먹지 않을만큼만 청소했다. 엄마하고 살았을 땐 청소는 당연히 엄마가 해주는 건 줄 알았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 청소는 당연히 남편이 해주는 것이 되었다. 결혼 후 아기가 태어나기 전 2년 동안 내가 과연 집안 청소를 몇 번이나 했으려나,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지도 않을 것 같다. 남편도 결벽증하고는 거리가 먼 데다 잔소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게다가 함께 사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에 동화도 쉽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청소를 잘 안했다. 2주나 한달에 한번 진공 청소기 돌리면 끝. 바닥을 닦아본 기억은 아마 무언가를 흘렸을 때 정도? 장판이 하얀색이어서 보이기에 하얗기만 하면 깨끗한 상태라 믿고 그냥저냥 지냈다. 그리고 사실 청소를 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바빴다. 주중에는 각자의 일터로 나가야 했고 주말에는 놀러다니기 바빴다. 청소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바뀌었다. 아이는 면역력이 약하니까 집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했다. 생전 한 번도 신경써보지 않았던 공기의 청정한 상태, 적절한 습도 상태도 유지해야 했다. 그래도 아기가 누워만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틸만 했는데 움직이기 시작하니 늘 비상사태였다. 우리 집에 숨어있는 공간이 그렇게 많았는지, 먼지라는 놈들은 왜 돌아서면 쌓이는지, 머리카락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빠져 바닥에 뒹구는 건지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였다.


청소기가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수시로 먼지를 흡입하기에 딱 좋은 간편 청소기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며 돌렸는데, 이건 편하기는 하지만 흡입력이 약하고 배터리가 금방 되어 항상 충전시켜줘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큰 유선 청소기로 늘상 돌리고 싶은데 너무 무거워서, 안 그래도 아기 안느라 나간 손목에 더 무리갈까봐 엄두도 안 났다. 자연스레 흡입력 강한 무선 청소기로 시선이 갔다. 문제는 가격. 분명 배터리가 2년도 안 갈거 같은데 왜 그리 비싼지. 그런데 먼지 흡입력도 좋고 일단 허리를 굽혀도 되지 않으며 청소 후 먼지 제거도 간편하고 배터리도 한번에 30분 이상 가니 집안 청소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다는 등의 메리트가 있었고, 이 모든 장점이 가격을 안 보이게 했다. 결국 삶의 질을 약간 개선하겠다는 명목 하에 구입하긴 했는데, 이거야 원, 소박한 마음의 수련승이 마당을 쓸다가 빗자루가 안좋다며 고급 빗자루로 사치를 부린 격이다. 애초의 소박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를 할 때면 이상하게 소박한 기분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청소기로 집안을 구석구석 돌려 먼지를 제거한다.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을 개고 베란다에 널린 빨래를 걷어 차곡차곡 갠다. 쌓인 빨래감은 다시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 한다. 젖병을 살균소독기에 넣어 소독하고 분유포트에 따뜻한 물이 가득하도록 끓인 물을 다시 넣는다. 이후 집안 곳곳에 청소포를 배치하여 바닥을 닦는다. 안방과 아기방, 거실과 주방까지 깨끗이 닦는데 청소포는 대략 6개 정도 든다. 그렇게 깨끗하게 닦고 난 후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마시면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있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면 널어주고 그렇게 청소 일과는 일단락된다. 이 모든 것들은 역시, 수련승이 된 기분으로 하지 않으면 영 즐겁지가 않다는 말이다. 어쩌면 나는 청소라는 것을 정갈한 마음을 입는 하나의 수단으로 정화 시켜서 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노 아야꼬가 말하기를, 좋아하는 일을 하든가, 하는 일을 좋아하든가 하랬는데, 아무래도 청소 부분에서는 '하는 일을 좋아하는' 쪽으로 나름 정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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