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아기와 함께 한 첫 1년

먹인다는 것, 먹는다는 것

gowooni1 2018. 11. 7. 10:44




4개월이 지나자 영유아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우편물이 왔다. 대단한 검사를 하는 건 아니고 키, 몸무게, 머리둘레, 영양상태 등을 체크하며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다. 우리 아기 수치로 말하자면, 키는 하위인 30%, 몸무게는 중간 정도인 50%, 머리둘레는 상위인 70% 가 나왔다. 으음? 눈치챘겠지만 다리는 짧고 머리는 크다는 얘기다. 뱃속에 있을 때에도 키는 평균보다 2~3주 가량 느리고 머리는 2~3주 가량 빨라서, 머리랑 몸길이가 늘 5주 정도 차이를 보이더니 역시 유전자는 속이지 못하나보다. 그리고 늘 바라는 역전은 없다. 그냥 건강히 자라나 주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래도 태어날 때 몸무게는 하위 1%였는데, 토를 많이 하면서도 열심히 먹더니 중간을 따라잡았다. 훌륭하다, 훌륭해.


4개월 정도가 되면 이유식을 시작해야 한다고들 했다. 근데 막상 이유식을 준비하려하니 이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아기 보느라 내 밥도 하루 한 끼 겨우 찾아 먹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유식을 만들라는 건지. 먼저 아이를 낳아 키워본 친구들은 매번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며, 한꺼번에 만들어놓고 냉동해 먹이라고 조언하는 겸 각종 도구들도 추천했다. 재료를 미리 다져 냉동실에 넣어두고 쏙쏙 빼서 그때 그때 쓰는 알알이 쏙, 환경호르몬을 방지하기 위한 글라스락 이유식 용기, 아기 국민 스푼이라 불리는 각종 이유식 스푼들, 옷에 흘릴 것을 대비한 턱받이 및 한 곳에 앉아 먹는 습관을 길러줄 아기식탁의자 등등. 아기 용품의 세계는 날로 점입가경이었다. 


처음 몇 달 간은 아기에게 스푼으로 음식을 먹일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 사실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먹이는 것도 허여멀건한 쌀미음 정도고 그것도 하루에 한 번, 스푼과 미음으로 놀이삼아 재미있게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시기엔 아기들이 이유식을 먹기 싫어하면 억지로 먹일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익숙해지도록 하는게 목표니까. 괜히 억지로 먹이다가 이유식을 싫어하게 하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제 생후 6개월이 되어 중기 이유식으로 넘어가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아기에게 본격적으로 철분 등의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 큰 목적이 된다. 매일 소고기 혹은 닭고기를 갈아 넣어야 하고 하루에 두번으로 횟수도 늘며 먹기 싫어하더라도 영양을 생각해 조금이라도 더 먹여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이 쌓인다. 그러다 10개월이 지나 후기 이유식으로 넘어가면 하루 세끼를 먹이는 것은 물론 분유 양도 줄여서 슬슬 완벽하게 성인처럼 먹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기 먹이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나에게는 여기에도 원대한 희망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먹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골고루 섭취시켜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많은 먹을 거리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맛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짧고 삶은 즐거워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식탐을 부추기겠다기보다, 식도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아무래도 즐거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은 더욱 행복해지니 말이다. 여기에는 만화 '오무라이스 잼잼'이 단단히 한 몫 했는데, 마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듯한 작가의 가족들을 보면서 '이야, 이렇게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 화목해지는구나'하고 매번 볼 때마다 감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서는 나도 '아기가 태어나면 함께 맛있는 것들을 많이 먹고, 무엇을 먹을지 함께 고민도 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야겠다'하고 부러워하곤 했으니 아기의 이유식 앞에서 사뭇 비장한 각오를 한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문제는 내가 먹는 것 앞에서 엄청나게 게을러진다는 거였다. 결혼 전에는 저녁 먹기가 귀찮아 안주 없이 맥주 한 캔으로 떼우기 일쑤였고 결혼 후에는 외식이 주를 이루었던 게 내 식단이다. 집에 음식 냄새가 배는 것도 싫고, 조리하느라 오래 서 있는 것도 다리 아프고, 설거지감이 산더미처럼 나오는 것과 음식물 쓰레기 치우는 것들이 엄청나게 큰 미션이었다. 그러니 아기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본격적 살림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도 어쨌든 아기를 먹이기 위해 요리라는 것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식단을 연구하고, 신선한 재료를 공수해가며, 한여름날 불 앞에서 오래오래 끓여 힘들게 만들어도, 아기가 잘 먹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대부분 한 두 스푼 먹고 땡. 아기는 이유식보다는 우유를 훨씬 좋아했으며 혹여라도 맛없는 이유식을 먹이면 신경질을 냈다. 그래, 내가 음식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경질을 낼 필요까진 없잖아? 어차피 이유식이야 간을 할 수도 없고 맛은 거기서 거기 아니냔 말이지. 혹시 몰라 시판 이유식을 사먹여봤더니 이게 왠거지 하며 입을 쩍쩍 아기새처럼 벌려가며 낼름낼름, 잘도 받아 먹는 것이다. 간이 되어 있는가 싶어서 한 번 먹어봤는데, 뭔가 감칠맛이 나는 걸 보니 분명 맛은 좀 더 있는데, 나트륨에 쪄들은 어른의 미각으로는 당최 짠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되면 포기하고 시판 이유식으로 갈아탈만도 한데 꿈만 원대해가지고 다음 번엔 좀 더 맛있게 만들어보겠다는 각오만 날로 늘어갔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며 우리 아기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늦는 편이긴 하지만 우유를 많이 먹어야 키가 크다는 둥, 자신의 첫째 아들도 서너살때 혼자 우유를 1리터씩 앉은 자리에서 마시더니 지금은 키가 180이 훨씬 넘는다는 둥, 위로를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그거고, 내 입장에서는 아기가 좀 더 이유식을 잘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늘 컸다. 조금씩 양을 늘려 이제 제법 잘 먹는다 싶으면 감기가 걸려서 다시 우유로 회귀를 하곤 했으니 아기를 잘 먹인다는 것은 정말 생각보다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9개월이 지나 다시 영유아 건강검진의 시기가 도래했다. 이번에도 아기는 지난 번과 같은 수준의 비율이 나왔다. 짧은 다리에 머리만 큰 체형. 그래도 몸무게가 꾸준히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짧은 다리에 머리만 큰데다 삐쩍 말라서 영락없는 츄파츕스였던 나의 소싯적 별명만큼은 내 선에서 끝내야지. 늘 잘 먹고 적당한 몸무게와 근육을 유지해주었으면, 무엇보다 늘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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