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은 아니고 내가 한 이십대 중반쯤 됐을 때 엄마한테 '다시 돌아간다면 몇 살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엄마의 대답이 이랬다.
"돌아가긴 뭘 돌아가. 그 많은 세월 다시 살기도 귀찮어. 그냥 지금도 시간이 후딱 후딱 가버렸으면 좋겠다."
그 말 뜻이 '그럼 빨리 죽고 싶은거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웃으며,
"인생 뭐 있어. 빨리 살고 죽으면 속 편하지. 어차피 다 죽는데."란다. 그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는지, 말 한 본인은 기억도 못할 것 같은데 내 기억에는 꽤나 깊이 박혀 버렸다. 인생에 대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관조적인 태도도 그렇고 주어진 명을 다하고 죽을 날을 기다리겠다는 초월적인 태도도 그렇고. 그 당시 나는 속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더 나은 삶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다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엄마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는 처음부터 엄마의 삶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큰소리 치는 엄마지만 결국 보면 우리들 뒤치닥거리 하느라 집안일을 다하고 지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게 솔직히 어린 내 눈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안일 좀 적당히 하고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 우리에게 들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대리만족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나중에 엄마가 되더라도 자식들 뒤치닥거리만 하지 않을 것이며 꼭 나만의 일을 가진 하나의 독립적인 객체가 되겠다고 남몰래 다짐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보니 이 두 가지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가능하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아이가 커가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긴 하지만 이만큼 키우는 데도 힘이 들어서,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컸다. 한편으로는 비록 내가 백만장자가 아니고, 내가 꿈꾸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지금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어서, 예전의 막연하게 바라는 것만 많고 이룬 것이 없어 조급하고 불안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미 내겐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아기가 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그 많은 세월 다시 살기도 귀찮다고 했던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란 말이다.
또 하나는 자식들 뒤치닥거리하느라 자신의 일을 갖지 못한 삶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9개월 남짓 아기를 키우고 있는 데에도, 청소하고 빨래하고 이유식 만들어 먹이고 우유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기저귀 치우고 하다보면 너무나 지쳐서 더 이상 다른 것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쩌다 아이가 낮잠을 길게 자서 잉여시간이 생기더라도 남는 에너지가 없거니와 아이를 위해 24시간 상시 대기하고 있다보면 나만의 일을 딱 잡아 하고 있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일을 갖지 못했던 엄마의 삶이 이해가 갔다. 자신의 일을 갖지 못하여 모든 기대가 자식들에게 투영되던 엄마의 삶, 그런 삶을 얕잡아 봤던 것도 사실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제는 그런 삶들이 가벼워보이지 않는다. 다들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이해도는 딱 내가 살아본 만큼인가보다.
내게는 돌아가야 할 직장이 있고, 아기는 돌이 지나면 온전히 어린이집에 맡겨야 한다. 처음에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아이가 잘 버텨줄까? 울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사실 어른들이 괜히 자책감에 하는 생각일 뿐이다. 아기는 생각보다 어린이집을 무척 좋아하며 데리러 가면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벌써 자신만의 사회성을 키우고 자기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직장에 다시 나가겠지만 과연 나는 진정 '자신의 일'을 가진 엄마인 걸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단순히 워킹맘일뿐 '자신의 일'을 가진 엄마는 아니다. 이것이 또 하나 내가 직면한 고민이다. 나는 아이에게 '인생이란 자신만의 일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 자신이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나 너는 꼭 그렇게 살아라, 라는 식은 영 유쾌하지 않다.
요 며칠 사이 아이 콧물이 다시 도졌다. 차가워진 가을 바람이 아직 면역력이 없는 아기들에겐 좋지 않았나보다. 엊그저께부터는 미열이 나서 보채고 끙끙거리는데 열이 애매하게 나서 해열제는 못 먹이고 그저 안아주고 토닥여줄 수밖에 없어 안쓰러웠다. 그 와중에도 곧 다가올 돌을 소규모로 준비하겠답시고 장소를 알아보고 사진 작가를 섭외하고 하는데 주말을 다 보내고 나니 또 무언가를 더 할 기운이 남는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다들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나보다. 아이 앞에서 어색하게 나를 지칭하던 '엄마'도 이제는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엄마한테 왔어요?','엄마가 해줄게', '엄마한테 오세요' 등등. 어제 밤에는 제법 컨디션이 돌아왔는지 장난도 치며 즐겁게 웃는데 갑자기 이 순간의 아름다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내 품에 포옥 안겨 있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겠어. 아이들은 금방 자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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