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삶의 질은 아기의 컨디션에 따라 절대적으로 결정된다. 거의 2달간 감기과 그로 인한 합병증-중이염, 부비동염, 인후두염-등으로 고생을 한 아기는 최근들어 이틀밤 열까지 내면서 세상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하더니 이제 제법 항체를 만들어냈는지 조금 잠잠해졌다. 물론 아직도 약은 먹고 있지만. 덕분에 내 몰골도 말이 아니었는데 이게 몰골에서 끝낼 일이 아니라 정신까지 파고드는 것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은 과연 진리다. 기진맥진해진 육체로 인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어서 내 깊은 한 구석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 영혼이 증발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영영 계속되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들었다. 분명 이 상태로 가다가는 정신이 위험하다. 힘든 몸을 겨우 이끌고 근처로 나가 오랫만에 나를 위한 쇼핑을 하겠다고 나섰다. 옷장에는 오백년 된 옷들만 가득해서 입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것도 외출하기 싫은 이유가 충분히 되는지라 일단 마음을 힐링하는 입고 싶은 옷이 시급했다.
나가니 어느새 가을이 완연하여 반팔티셔츠를 입은 내 팔에는 서늘한 바람이 감돌고 햇볕은 아직 여름처럼 뜨거워 양지에 나가면 얼굴이 따가웠다. 옷을 사러 나간 인근 전철역 근처에는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차고 사람들이 바쁘게 북적대며 사는 모습이 나를 빠르게 우울의 늪에서 건져올렸다. 그냥 그렇게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을. 평소라면 읽기도 힘든 책을 서가 구석에서 한시간 가량 읽으니 마음까지 충전되는 게 다시 현실로 돌아가 아기와 열심히 놀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집에 와서 보니 내 옷이라고 산 것은 집에서 편하게 입을 긴 파자마 바지 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아기 물품이다. 가을이라 추워진 날씨에 대비한 아기 양발 세켤레, 같이 노래 부르며 들을 사운드북, 색칠놀이 책과 색연필 등등.
어제는 친구가 산타클로스처럼 장난감들을 잔뜩 들고 방문했다. 함께 족발을 시켜먹고, 아기를 데리고 소아과에 다녀오고, 새로운 장난감들 속에서 노는 아기를 바라보며 다과를 곁들인 수다를 떠는 그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과를 사기 위해 집근처 편의점에 들렀는데, 편의점 주인 아주머니께서 우리 둘을 한참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추측하고 싶어하는 표정이라 내가 먼저 '친구에요' 라고 말해줬더니 '아하' 하면서 웃으신다. 이어 내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셨어요?'라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생긴 것은 좀 다르게 생긴것 같은데, 뭔가 분위기가 비슷해서 헷갈렸어요'라고 하신다. 아마 자매라고 생각하셨나보다. 우리는 둘다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라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데 아마 그래서 우리가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벌써 우리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친구로 지냈으니 알게 모르게 더 비슷해졌을수도 있겠다. 멀리 사는 관계로 몇 시간 머물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는 친구에게 '우리가 옆집에 살았으면 정말 좋았을텐데'하고 아쉬움을 비췄다.
나와 친구는 어쩌면 분위기만 닮은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까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둘 다 가보지 못한 인생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어느 정도 세상이 요구하는 만큼 공부를 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만큼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이미 부자라 하고 싶은 일에서 돈이 많이 안 벌려도 그냥 하며 넉넉히 사는 사람들보다, 돈을 벌어야 생계가 유지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적당히 만족할만큼 돈을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미 그 친구의 동생은 그렇게 살고 있어서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동생은 자우림의 '오렌지 마말레이드' 가사 -하고픈 일도 없는데 되고픈 것도 없는데 모두들 뭔가 말해보라 해. 별다른 욕심도 없이 남 다른 포부도 없이 이대로이면 안되는 걸까-와 비슷한 심정으로 인생 전반부를 살더니 20대 중반부터 네일 아트가 너무 하고 싶다고 선언하고는 진로를 전향하여 현재는 꽤 인지도 있는 네일아트를 하고 있다. 우리의 월급보다 훨씬 많은 매출을 올리는 건 보너스.
한 3주 전 머리를 하러 들른 샵에서 만난 디자이너도 떠올랐다. 말에서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던 그 디자이너는 처음엔 다소 무뚝뚝한 분위기로 머리를 만지더니 나중에는 자신의 인생사를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는데, 자신은 이 일이 정말 너무 하고 싶어서 한 일이라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헤어 디자이너들이 중고등학교때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이 친구는 꽤 늦게 시작했는데, 대학까지 입학했다가 도저히 이 길이 아니다 싶어서 자퇴 후 부모님 몰래 등록금을 반환받아 그 길로 미용학원에 등록을 했단다. 군대를 갔다온 후 5년 전에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산 결과 현재는 디자이너로서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지금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하다는데, 이 친구, 분명 나보다 한참 어릴텐데도 정말 소신이 뚜렷한 어른처럼 멋진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자책하듯 묻는다.
'그래, 대체 언제까지 멋진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들을, 멋지다고 부러워하며 살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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