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gowooni1 2015. 5. 23. 00:09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원제는 The Sense of Ending'. 즉, 엔딩의 감, 엔딩 예감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은 다분히 편협합니다. 내 엔딩의 감이 틀릴 수도 있는 거고 맞을 수도 있는건데,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고 미리 못박아 버리니 엔딩의 감이 실제 엔딩과 다르거나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제목인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마케팅을 위해 갖다붙인 제목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말의 감' 정도로 번역했더라면 이 책이 별로 팔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전 이 책에 반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먼저 듣고 추천을 받아 읽었습니다. 반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읽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 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줄리언 반스 라는 작가가 막연히 여자일거라 생각했고, 이 책이 요즘 흔히 유행하는 영미 문학의 로맨스 멜로 소설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편견에 의한 두번의 반전을 더 겪어야만 했습니다. 첫째, 줄리언 반스는 기껏해야 30줄 말이나 40줄 넘은 멜로 여작가가 아니라,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영국의 남자 작가입니다. 두번째, 이 책은 멜로라기 보다 드라마. 그것도 지독하게 모자라고 자의식 강한 찌질이의 독백에 가깝습니다. 글쎄, 이 정도는 책의 중반 정도도 읽기 전에 쉬이 느낄 수 있을테니 적어도 저에게만 해당하는 반전일 겁니다.


세번째. 이 반전은(물론 결정적인 반전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고등학교 시절 전학생으로 자신의 세계에 들어온 에이드리언에게 호감과 동경과 질투와 선망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가볍다가 가끔씩 진지한 자신과 달리 에이드리언은 기본적으로 진지하며 매우 가끔 농담을 합니다.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고차원적인 그와 자신이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저는 이렇게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싱크로 했는데, 이렇게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닌가 봅니다. 책의 뒷부분에 살짝 첨부되어 있는 역자의 감상에도 이러한 언급이 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데미안과 다른 작품이듯, 싱클레어는 토니 웹스터와 다르고, 데미안은 에이드리언과 다릅니다. 데미안이 끝까지 싱클레어의 선구자로, 독자들의 롤모델로 존재한 이상적인 존재인데 반해 에이드리언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 제공하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은 마냥 좋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도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좋았다고 생각하는 책만을 소개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읽고 나서 별 볼일 없는 책이었다면 왠만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이 책은 엄청 좋으니 꼭 읽어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졸작이니 읽을 가치도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 읽고나서 독자에게 어떠한 종류의 감정을 남기느냐가 중요한 사람과, 감정보다 서사가 펼쳐지면서 주는 놀라움이나 이야기 전개과정의 구성이 중요한 사람에게 각각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의 종류가 다르니 말이죠. 전자에 해당하는 분에게는 살짝 조심스러운 감도 없지 않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분에게라면 망설임없이 읽어보라 권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분량이 굉장히 짧은만큼 금방 읽을 수 있긴 합니다. 게다가 가독성이 좋아 술술 읽힙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막 읽다보면 어느순간 이야기의 맥을 놓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러다 엔딩으로 가면 제대로 이해못한 독자들은 분명 책의 앞부분을 펼치거나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정도면 이야기 구성 하나는 참으로 기가 막히게 했죠. 작가의 역량이 보통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