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작가의 '미실'은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 수상을 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째 선뜻 읽을 마음이 나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만든 소설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 쓰지 않는 단어들을 읽는 것이 재미없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할 무렵 미실이라는 여자가 실존인물인지 궁금해져서 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때에도 몇 장 못 읽고 덮었습니다. 지나치게 꾸밈이 많은 문장들에 금방 질려 압도되었다고나 할까요. 아니 이렇게 지루한 스타일의 문장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데 한 권 분량은 도저히 못 읽겠다, 하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미실'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실이라는 사람을 검색해봐도 나오는 결과가 지극히 미약했습니다. 결국 미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녀를 가장 많이 조사하고 역사적 사실을 파악해 소설화 시킨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판단, 다시 한 번 김별아 작가의 미실을 찾았습니다. 그 사이 소설은 무삭제 개정판이 나와서 좀 더 읽기 편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아니면 중간에 흘렀던 시간동안 책을 보는 제 눈이 변하여 작가의 화려한 문장에 별 피로한 기색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구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설 '미실'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과는 많이 다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주인공이 선덕여왕이기 때문에 미실이라는 강적을 내세웠고, 선덕여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실의 최후가 좀 더 극적으로 그려질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소설 '미실'은 주인공이 이미 미실이기 때문에 그녀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들과 그녀를 스쳐간 많은 남자들과의 스토리가 주를 이룹니다. 당연히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도 않네요. 저는 이 작품 속에서도 선덕여왕과 미실이 실제로 대치하는 관계였는지를 찾다가 결국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실은 진골로 대원신통의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입니다. 귀족이긴 하지만 대원신통입니다. 대원신통의 임무는 왕족을 색공지신으로 모시는 임무입니다. 색으로 왕족을 모시는 신하라는 의미의 색공지신이니 말은 그럴싸하고 귀족이라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왕들의 공식적 기생이라고나 할까요? 아직 유교적인 관습이 크게 뿌리내리지 않은 고대국가이니 그만큼 성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겠지만 요즘 세상에 색공지신이라는 신분의 존재는 아무래도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족들의 첩이 될 것으로 결정되어 있고, 어릴 때부터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방중술과 애교술을 능통히 배워 남자들을 녹이는 법을 터득하도록 자란 미실이었습니다. 무조건 아름답고 예뻐야 했고 마땅이 그러했으며, 그래서 많은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이기 위해 태어난 여자였던 것입니다. 미실이라는 자가 대체 어떻게 진흥제, 진지제, 진평제 3대의 왕과 관계를 갖고 그 외에 본 남편 세종과 수 많은 첩을 가질 수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 그 궁금증이 풀릴 것입니다. 미실은 그냥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색공지신으로서의 임무였을 뿐입니다. 그러하지 않았으면 반역으로 일족이 멸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이거죠.
하지만 과연 그녀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빼앗지 못했다면, 가질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면, 그녀에게 색공지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일족을 멸하는 벌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그럴만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색공지신으로 모시지 않으면 엄벌을 처하겠다는 권위를 빌린 협박까지 하면서도 왕들이, 그리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을 미실은 본능적을 깨달은 거고요. 과연 미실은 색공지신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여 남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만큼 점점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저는 유난히 미실의 마지막이 궁금했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처럼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음을 택하는지 아닌지. 조사해보면 미실은 늙어서 병사했다고 나옵니다. 소설에서도 미실은 비교적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미실은 생의 모든 것을 누렸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궁에서 나와 비구니가 되어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늙어 죽습니다. 책의 마지막을 벌써 알려드렸으니 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제가 아마 '미실'을 읽는 묘미는 결말을 아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전달하지 못한 거에요. '미실'은 그녀의 남성편력을 알기에 최고의 자료입니다. 신라의 역사적 사실과 그 시대 사람들의 성에 대한 인식을 알기에도 그만입니다. 미실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인지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에 한동안은 빠져서 지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습니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0) | 2015.05.23 |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 라우라 에스키벨 (0) | 2015.05.03 |
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0) | 2015.03.30 |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0) | 2015.02.23 |
깊은 강 - 엔도 슈샤쿠 (0) | 2014.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