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그냥 집어든,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 입니다. 그냥 서점에 가서, 저자나 책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책 표지와 제목만 보고 구입한 책은 정말로 몇 안 됩니다. 특히 소설은 말이지요.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리스본'이라는 제목이 주는 이국적이고 시적인 향기와 책 겉표지에 있던 멜라니 로랑 이름 때문이었어요. '아,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이 책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모양이고, 이 영화에 멜라니 로랑이 나오는구나. 한번 책을 읽고 영화를 봐야겠는걸.' 이렇게 해서 낚인 셈입니다.
쉽게 낚인 책치고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술술 읽히지만은 않습니다. 문장의 호흡이 짧지 않고, 쓰인 단어가 익숙하지 않으며, 포르투갈 이름이나 외국 지명들도 생소해서 작품의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시간을 요합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도 독자가 마냥 친근감을 느끼기에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나이 육십이 다 되도록 스위스 베른에서 고등학생들에게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를 통째로 다 외우고, 걸어다니는 고전문학의 사전이라 불리울만큼 박식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바에 결코 틀림이 없어 모든 학생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 역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잘못되었다고는 한 번도 의심하지 못한 채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며 고전문헌들에서 행복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그의 삶에 개입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장소에서 어제와 같은 곳으로 출근하기 위해 서 있던 전철 플랫폼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살을 시도하려던 한 여자의 목숨을 구합니다. 굉장히 멜랑꼴리하지만 엄청난 흡인력으로 그레고리우스를 궤도이탈시켜버리는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라틴어와 가장 비슷한 말로 '포르투게스'라는 말 한마디와 전화번호 하나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 그 길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삶을 이탈하고 홀연 포르투갈과 포르투갈어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헌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책을 하나 추천을 받는데 그 책 역시 보통 책이 아닙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그 책은 30년도 더 전에 출간된 책으로 '아마데우 프라우'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굉장한 영혼의 깊이를 가진 '아마데우 프라우'와 의문의 포르투갈 여자.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삶으로 흠뻑 빠지고 '아마데우 프라우'의 흔적을 뒤쫓기 위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이쯤되면 저는 '아, 저 의문의 여자가 멜라니 로랑이구나. 언제쯤 그레고리우스와 재회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무작정 포르투갈로 향하게 된 것 같고, 약간 개연성은 없지만 분명 우연히 둘은 재회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웬걸, 그레고리우스는 독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점점 삼천포로 빠져듭니다. 의문의 포르투갈 여자를 구한 것 때문에 그 언어에 홀딱 빠져서는, 헌책방에 들러 주인장에게 괜찮은 포르투갈 책을 추천받아 사고, 그 책 저자의 매력에 빠져 리스본으로 떠나 포르투갈 책 저자의 흔적을 쫓는다는 것이 사실 말이 됩니까? 그것도 지금껏 잘 나가던 인생을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말이죠. 아무리 그레고리우스가 나이 육십이 다 되었다고 하지만, 차라리 자신이 구해준 여자의 매력에 빠져 그 여자를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포르투갈로 갔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레고리우스는 그녀를 다시 만날 의사가 없어보입니다. 대신 아마데우 프라우의 흔적을 쫓으면서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열정적이고 천재적이며 격동적인 인생을 음미하는 것에 더 푹 빠져 있습니다. 아마데우 프라우라는 언어의 연금술에 탁월한 천재이자 의사였던 포르투갈 사람, 그 타고난 천재성 때문에 가족들에게조차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했지만 인간백정이라 불리던 독재정권하의 수하를 살린 일 때문에 대중의 외면과 멸시를 견뎌야만 했던 사람, 태생은 부르주아지만 알맹이는 프롤레탈리아였던 사람, 그래서 프롤레탈리아 친구 조르지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 조르지의 애인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보고 한눈에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지만 친구와의 신의 때문에 애써 외면했던 사람.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 프라우와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접근하면서 이 천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몸소 느껴보고자 합니다.
이 긴 소설을 내내 읽으면서도 역시 끈질긴 독자인 저는 '아니 그래서 멜라니 로랑은 언제 나오는데? 처음 그 포르투갈 여자는 어떻게 연관성이 있어서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 거야?'라는 의문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 안나올거 같으니 슬슬 시들해집니다. 나중에는 그레고리우스의 행적과 동화되어 포르투갈 여자의 등장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마데우 프라우의 인생 추적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다 이내 작은 유레카를 외치죠. 유레카! 멜라니 로랑은 처음 그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라 조르지의 애인이자 프라우의 연인, 이름이 인물을 따라가지 못하는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던, 기억력이 너무나 좋아 저항운동의 핵심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 바로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였던 겁니다.
뭐 그건 제 나름대로의 작은 발견일 뿐이었고, 과연 그레고리우스는 어떻게 될까요? 과연 처음의 그 포르투갈 여자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까요? 자신의 본거지였던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교편을 잡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을 살까요? 아니면 기왕 제대로 살기 시작한 인생이니 포르투갈이든 어디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곳에서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까요? 그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된다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고 어느 정도는 짐작도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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