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미루고 미루던 영화 '안녕 헤이즐'을 봤습니다.
미룬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인데 공감되어봤자 얼마나 될까?
게다가 최근 연이어 읽은 단순 신파조 미국식 소설에 살짝 질려있었던지라 조금은 더 미뤘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약간의 감수성이 존재하는 사람이고 영상매체를 볼때는 그 감수성이 좀 더 많이 발동을 하는 편이기 때문에 눈물이 났다는 겁니다.
그건 주인공들이 단순한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좀 많이 아픈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극한까지 아파본 적이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매일 죽음의 문턱에서 생과 사를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인생의 깊이가 깊어질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헤이즐은 어릴때부터 너무 아파서 생과 사를 넘나들던 열 일곱살 소녀입니다. 폐가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호흡을 도와주는 산소통을 항상 들고 다니고 코에는 산소를 공급해주는 튜브를 끼고 있습니다. 이 소녀는 아팠던 기억밖에 없어 만사에 시니컬합니다. 엄마는 그런 헤이즐에게 평범한 열 일곱살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고 재미있게 보내라고 하지만, 그마저도 헤이즐은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헤이즐은 역시 철이 좀 든 여자아이라서, 아파서 곧 죽을 자신보다 그런 자신을 키우고 있는 부모의 마음이 훨씬 아플거라는 걸 잘 압니다. 엄마의 소원 한 번 들어주는 셈 치고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곳에 나가봅니다.
거기는 온통 아픈 사람들 천지입니다. 암을 극복한 사람도 다행히 있지만, 암이 속수무책으로 진행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암도 다양하고 각양각색라서 누구는 눈을 잃을 예정이고, 누구는 고환을 잃어버렸고, 누구는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를 잃어버린 열 여덞살 청년 어거스터스와 헤이즐의 두 눈이 딱 마주쳐버렸습니다. 그리고 포스터만 봐도 예상할 수 있다시피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인생이 재미없던 소녀 헤이즐은 이제 어거스터스와의 관계에서 삶의 활력을 찾습니다. 자신은 굳이 부인하려 해도 어거스터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며칠동안 아이폰을 들고 초조해하고 그가 권한 소설을 읽으며 소년을 생각합니다. 엄마도 딸이 평범한 소녀로서의 감정을 겪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흐뭇해합니다.
헤이즐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쓴 소설가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주인공은 죽지만 남은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뒷 이야기를 반드시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고, 엄마와 아빠한테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덜할 것 같습니다. 헤이즐에게는 열 세 살때의 기억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가 꽤 큽니다.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에서 더 이상 견딜수 없다고 절규하던 엄마와 아빠의 눈물이 뇌리에 그대로 박힌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헤이즐이 그 작가를 만나야 하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복잡한 감정에 대한 정화를 얻기 위해서이죠. 비록 그것이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쓴 작가의 생각에 불과하더라도 말이에요.
미국에는 소아암 환자를 위한 지니재단이 있는데, 이 재단에서는 암에 걸린 어린 환자들의 마지막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는 일을 한답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지니재단에 연락해서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그 작가를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라고 말하지만 헤이즐은 그럴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열 세살때 죽을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미 디즈니랜드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으로 그 기회를 써버렸거든요.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여자아이가 그런 유치한 소원에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놀리는 어거스터스지만, 그는 자신의 소원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자신이 헤이즐과 암스테르담에 가서 그 작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겠다 합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소년 어거스터스를 헤이즐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수월하고 해피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겁니다. 이쯤되면 뭔가 방해물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번엔 헤이즐의 건강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다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갑자기 폐에 물이 차서 응급실에 실려간 헤이즐은 담당의로부터 암스테르담에 절대 갈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낙담합니다. 또 한 번 죽음의 고비에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결코 어거스터스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떠날때 아파할 사람은 부모님이면 족합니다. 더 아파하고 슬퍼할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터스는 자신이 결코 헤이즐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헤이즐이 먼저 죽게되어 마음의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할지라도 그걸 선택한 것은 자신이며 자신은 헤이즐을 사랑하지 않느니 힘들고 아플 운명을 선택할거라고 말합니다. 둘은 다시 그렇게 친구로서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하여 엄마까지 동행한 암스테르담 여행을 떠납니다.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 암스테르담 여행은 꿈 같습니다. 아름다운 유럽의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고 멋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과 샴페인을 마시고, 길거리 음악가들의 수준높은 공연을 듣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작가와의 만남은 이 꿈같은 암스테르담 행을 수포로 만들어버립니다. 작가는 헤이즐이나 어거스터스가 생각한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아침부터 스카치위스키를 들이키는 알코올중독 증세에, 본인들 앞에서 괜히 어린애들을 만나겠다고 했다며 악담을 퍼붓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헤이즐이 듣고 싶어하는 애프터 스토리는 절대 들려줄 수 없다며, 아픈 아이들은 꼭 그런식으로 응석을 부리려 하지만 자기만큼은 절대 그런 응석받이에 맞춰 줄 수 없고 하다못해 동정도 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분개하여 작가의 집에서 나가버립니다.
두 사람의 기분은 최악이지만, 그런 작가 나부랭이 때문에 남은 암스테르담 여행 전부를 망칠수는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안네 프랑크가 살았던 집의 구석구석을 힘겹게 오릅니다. 마지막 안네가 숨어있던 방 꼭대기에 올라와서, 힘겨워도 인생은 행복할 수 있음을 낭독하는 방송 나레이션에 감정이 고조된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에게 급속히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역사적으로 기록에 남을 꿈같은 밤을 보냅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에게 고백합니다. 사실 자신의 암은 재발되고 전신에 전이되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항암치료를 받게 되겠지만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어거스터스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항상 씩씩하게 웃으며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그런 그가 헤이즐보다 먼저 죽어가고 있으니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버텨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거스터스가 부탁한 추도사를 쓰며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분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남겨진 사람이 될거라고 상상해보지 못했거든요.
어거스터스는 다행히 마지막까지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진정 강하고 쾌활한 소년입니다. 자신이 참석할 수 없을테니 장례식을 리허설하여 자신 앞에서 미리 쓴 추도사를 읽어달라고 헤이즐에게 말합니다. 헤이즐은 이 추도사를 통해 어거스터스에 대한 자신의 모든 마음을 고백하며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정확히 8일 후 어거스터스는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은 짧아서 감사하고 고맙고 늘 좋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막상 삶을 살아가다보면 의지와 반대되는 많은 상황들 때문에 그런 진리를 잃고 현재의 부정적 감정에 시간을 소비하게 되잖아요.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면 아무래도 좋은 기분 리셋을 더 자주 하게 되겠지요. 이 영화는 세상에 주어진 시간이 20년도 채 되지 않는 어리고 아픈 자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현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아프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원하는 일을 한가지는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고,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잘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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