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친밀함과 정중함의 아슬아슬한 갭

gowooni1 2013. 7. 8. 22:45

 

 

 

일행과 함께 전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우리 앞에 나이가 상당히 지긋한 한 커플이 섰다. 남자 쪽은 할아버지라고 불리워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로 보였고 여자 쪽은 음,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할머니이긴 하나 스스로 가꿈을 게을리하지 않아 여성미를 잃지 않은' 아주머니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이를 꽤 드신 것 치고 곱게 화장을 한 것 하며 여성스럽게 말하는 어조 하며 악세서리를 적당히 착용한 것 등등 꽤나 미적감각이 있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함께 서 있는 할아버지에게 건네는 말씨와 손짓 하나하나가 하도 나긋해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홀딱 반해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의 눈빛을 읽고 상대를 남자로서 대우해주는 폼이 영락없이 사랑에 갓 빠진 커플이었다.

 

이쯤되니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저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라면 부부라 쳐도 한창 오래되었을 사이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서로에게 정중하지 않은가. 함께 오래 산 사람들이라면 화제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아 대화가 별로 없는게 보통이지만 이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적당한 화제를 골라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부부가 아닌 걸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존댓말을 꼬박 꼬박 쓰면서도 할아버지에게 '자기'라는 애칭을 간간이 섞어 썼다. 그러나 그 정도 애칭은 그 나이 먹은 사람들이라면 별로 깊은 사이가 아니더라고 친한척 하며 자주 애용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단지 호감이 있는 남녀 관계인가?

 

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계와 반지가 커플로 한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반지면 반지만, 시계면 시계만 커플로 차고 다닐텐데 시계와 반지를 풀로 완벽히 차고 다니는 커플이라니. 그렇다면 이 커플은 이제 막 공식적으로 커플임을 세상에 천명한걸까? 전철에서 내리면서 일행과 함께 추측에 들어갔다.

 

- 어떤 사이 같아?

- 글쎄.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느니, 간사님이 걱정이 된다느니 하는 걸 보면 기독교인인 것 같다만.

- 커플인 건 확실해. 커플링과 커플시계를 차고 있었으니까.

- 근데 서로 상대에게 너무 깍듯하잖아. 부부라면 오래된 사이라고 보긴 좀 어렵겠어.

- 늘그막에 서로 적적해서 교회에 나갔다가 만나서 결혼에 골인한 커플일까?

- 어쩐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추론인데. 둘 다 재혼일거야.

- 할머니가 여성미가 넘치시는 게, 할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시겠어.

 

그건 그렇다치고, 이 커플이 오래되지 않아 정중했다면 왜 사람들은 오래된 사이일수록 정중하지 못한 것일까? 왜 딸들은 엄마가 말하는 썰렁 유머에 반응이 없다가도, 회사 팀장님이 연발하는 썰렁한 개그에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재미있는 척 해주는 걸까? 회사 팀장님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예의를 갖춰야 하는 상대이고, 부모님은 너무 친해서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오래된 사이의 유대감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중함, 서로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쏟아붓는 관심과 에너지와 집중력, 그리고 상대에게 몰입하는 반짝거리는 눈빛도 놓치긴 아깝다. 어쩐지 유대감과 설렘, 친밀함과 정중함은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양립만 되어서도 안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팀장님이 하는 썰렁한 유머에는 웃음으로 반응하다가 집에 와서 엄마가 말하는 썰렁한 유머에는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흠칫, 냉담한 리액션을 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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