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심각해지려는 병

gowooni1 2013. 6. 5. 00:36

 

 

솔직히 나에겐 심각해지려하는 병이 있다. 어떤 지병이 있는데 이제 그 증세가 심각해진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걸핏하면 심각해지는 병이다. 일종의 습관이라고나 할까. 얼핏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습관처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보니 머리도 지끈거리고 웃음도 줄어드는 게 아, 이대로 가다간 정말 유머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겠구나 싶어 또 다시 한번 심각해졌다. 음, 이건 정말 아니지.

 

매사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병은 원래 예전부터 늘 그랬다. 대학입시 때에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 공부 계획을 세울 것인가 밤새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래서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다 갔다. 근데 늘 그 계획에는 오늘 하루치의 목표량이 포함되어 있었고, 오늘 하루는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다 보내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날이 되면 또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거다. 어제 하지 못한 공부량을 보강할 계획을 다시 세워야지, 그런데 그 량이 상당해서 또 며칠분량의 계획을 수정하고 그런 식으로 또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 보면 또 시간이 다 갔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쌓이다 보면 이제 하지 못한 공부량이 점점 축적되어 결국엔 맨날 진지하게 계획만 세우다 끝나고 마지막엔 진짜로 심각해져 버리는 것이다. 아마 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제일 잘하는 것이 있다면 걸핏하면 진지해지기, 매일 계획 갱신하기, 그러나 실행은 하지 못해 끝내는 심각해지기, 정도겠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첫 번째로 들어간 회사의 신입사원 연수때 연극을 하기로 하였는데, 내가 맡은 역할은 본 조비를 흉내낸 고음불가 역. 그런데 문제는 내가 티브이를 거의 안 본다는 것에 있었다. 티브이를 보지 않으니 개콘 같은 프로도 모르고 요새 유행하는 유머 코드도 알 리가 없는 거다. 그러다보니 내가 맡은 역할은 마지막에 고음불가를 내어 반전을 주어 관객들에게 웃음을 빵, 터트리는 거였는데 그만 엄청나게 심각해지고 말아서, 나는 그만 올라가지도 않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It's my life를 외치고 말았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내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으니 어떻게 보면 웃기긴 웃긴 셈이다.

 

근데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심각한 포스로 살고 있는 거지? 아, 정말 재미 없네. 이렇게 재미없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매사에 진지해서야 어디 사람들이 날 보면 즐거운 자리에 불러주고 싶겠어? 물론 사람들에게 불림을 당하기 위해서 진지해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함께 있고 싶어하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게, 마냥 심각하게 미간에 인상 쓰는 사람보다야 낫지 않겠느냔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옛날에 썼던 내 일기들마저도 너무 고민으로 가득한게 숨막히도록 심각해서, 다시 읽고 싶어도 재미가 없다는 거였다. 물론 엄청 옛날에 쓴 것들이긴 하지만 지금 보면 별 것도 아닌 고민들이거나 혹은 여전히 하고 있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고민들일 뿐인데 뭐가 그리 심각한 건지. 나도 하고 너도 하고 누구나 하는 고민이란 말이야, 라고 옛날의 나에게 꿀밤 한 대. 일기란 것이 일반 독자를 상정하고 쓴 게 아니니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하나뿐일 나라는 독자마저도 숨이 막혀 읽기 싫은 일기라는 건 뭐랄까, 어쩐지 좀 서글프지 않은가.

 

어쨌든, 진지한 건 좋지만 심각하기만 한 건 재미없으니 좀 명랑하게 살아야겠다는 요지이다.

그러다 깊이가 없어지면 안 되는데.

이런, 또 진지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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