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창백한 언덕 풍경 A Pale View of Hills

gowooni1 2013. 1. 31. 21:49

 

 

 

 

작은 딸 니키가 '나'를 잠깐 보러 와 시골집에 몇 주 머문다. 니키는 사랑스럽고, 엄마에게 마음을 쓸 줄 아는 착한 애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확실히 선을 긋는다. 예를 들어 현재 지내고 있는 런던에서의 생활이라던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라든가, 그런 부분에선 말을 아낀다. 조용하고 변화없는 시골집에서 하루하루 소박하게 살아가는 에츠코에게 있어 그런 점이 섭섭하다거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에츠코도 자기 삶의 평온을 유지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중년의 여자일 뿐이다. 에츠코와 니키가 주위 사람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에츠코는 순수 일본인이고 니키는 혼혈 영국인이라는 점. 그러니까 에츠코는 일본에서 만난 영국인 남편을 따라 영국에 와서 니키를 낳은 순수 일본인이다.

 

니키의 짧은 방문은 작품 표면상에 흐르는 시간일 뿐이고 진짜는 그와 동시에 에츠코의 머리에서 회상되는 수십 년 전 일본에서의 추억이다. 산책을 하다가 그네를 타는 한 소녀를 보고서 그녀는 문득 수 십년 전 나가사키에 살던 떄를 떠올린다. 정확히 말하면 나카사키에 살던 몇 주 간 잠깐의 우정을 나눈 사치코와 그의 딸 마리코를 생각했다. 원폭 투하로 인한 물리적 심리적 피해, 패전으로 인한 사람들 마음의 우울함이 완전히 가시지 못한 그 조용하고 나른한 시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실의 아픔을 딛고 희망의 끈을 조심스레 붙잡은 채 살아간다.

 

첫번째 결혼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애를 임신한 몸으로 하루하루 소소하게 보내던 에츠코는 자신의 아파트 앞으로 너르게 펼쳐진 황무지 저편 오두막에 누군가 살고 있는 걸 알게 됐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을만큼 교육을 받은 오만하고 우아한 여자 사치코와 그의 딸 마리코다. 심심하던 에츠코는 오만해서 아무나와 사귀지 못하던 사치코의 마음에 들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된다. 에츠코는 미군병사 애인이 언젠가 자기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줄 것이라고 믿지만 매번 배신당하고, 마리코는 전쟁중 겪었던 수많은 비참한 사건들과 맞물린 사춘기에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에츠코는 오만하면서도 배신만 당하는 사치코에게 연민을 느끼고,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마리코에게 마음을 쓴다.

 

한편 집에는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며 이기적이기까지 한 남편 지로가 오직 출세만을 생각한 채 아내인 그녀를 종종 무시한다. 그렇지만 그 시대 남편 아내가 대개 그러했듯이 에츠코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워낙에 착하고 순종적인 그녀는 오히려 시아버지를 좋아한다. 마침 몇 주 머물러 오사카에서 나가사키까지 방문한 시아버지 덕분에 에츠코는 집에서도 별로 심심하지 않다. 일평생 교사로 지내다 퇴직한 시아버지는, 자신들이 가르쳤던 주입식 세뇌식 교육방식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아내가 남편과 다른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완벽한 옛날 사람이지만 남에게 반감을 느낄 줄 모르는 에츠코의 성격상 그게 별로 눈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들 지로가 그런 아버지를 더 성가셔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그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패전 직후 일본을 배경으로 쓴 작품들의 공통점이 굳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어딘가 너무 조용해서 우울하기까지 하다. 일본식의 애환이 서린 우울함이라기보다 유럽식의 변함없이 조용한 우울함이다. 이시구로는 사실 이름만 일본인이지 영국작가인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으로 건너가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아무리 일본을 배경으로 해도 대륙 동쪽 끝 섬나라의 정서가 아니라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에서 풍기는 대륙 동쪽 끝 섬나라의 정서가 흘러나온다. 더군다나 나릇하고 나긋하게 조근조근 풀어나가는 어투는 여성을 화자로 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 어렵게 주절거릴 것도 없이 그게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만의 분위기, 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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