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gowooni1 2012. 5. 31. 22:36

 

 

 

한때 잘 나가던 컨설턴트 임도랑은 회사에서 짤리고 고시원을 전전하며 알바로 연명하는 신세다. 전 회사에서 현대판 마타 하리(세계1차 대전 때 창녀였던 고급 산업스파이) 진주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중차대한 기밀을 넘겨버려 회사에서 짤리고 부채까지 상환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노숙자로 전락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는데 신이 돕지 않는 건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옆 방 여자를 덮치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상황이 몰려 그만 그 가장 싸고 버틸만 했던 고시원에서조차 쫓겨났다. 찜질방 갈 돈이 아까워 노숙이나 좀 해보려고 후미진 건물에 들어갔더니 거기서 만난 날라리 고딩들한테 오늘 받은 일당을 털려버렸다.

 

현재 임도랑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돈은 여러 군데에서 나왔다. 부잣집 마나님들의 고급 개를 산책시켜주는 일, 고급 한정식 집 불판 닦는 일, 가끔씩 떨어지는 역할대행 사무소에서 심부름꾼 하는 일. 다행히 식당에서 도랑의 사정을 알고 빈 방에서 자도록 배려해주었기에 노숙자 신세를 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정이 떳떳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예전 회사 사람들을 우연하게라도 만날라치면 외면하고 먼 길을 돌아 걸어야만 했다. 대기업 임원들을 상대로 은퇴 후 미래를 컨설팅 하던 자신만만하고 패기 가득한 임도랑은 한동안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게다가 개를 산책시키는 와중에 그만 또 사건이 터져 그 알량한 용돈 나오는 일거리도 없어졌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고 싶었지만, 1분이면 신원조회 완료되는 세상에서 산업스파이로 짤린 전적의 임도랑을 채용하려고 하는 기업은 일 년 동안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저 그렇게 알바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역할 대행 사무소 일은 그럭저럭 할 만 했다. 일거리가 일정하게 유지되지는 않았어도 한 번 들어오면 짧은 시간에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결혼식 친구도 서고, 때로는 학부형 역할도 했다. 집안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려는 여자의 교육 잘 받은 오빠 노릇도 했고 잘 알지 못하는 물건을 배달만 하는 서비스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려놓은 진주를 떠올리며 그때 착한 척 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그 여자에게 떠넘겼으면 이렇게까지 전락하지는 않았을거라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다시는 예전의 잘 나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임도랑에게 고급견 짱아오의 산책을 맡기는 임무가 떨어졌다. 한 마리면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거뜬이 살 수 있는 이 강아지의 산책 수행자로 그가 간택된 건 일종의 운명이었다. 콧대높은 라마는 이상하게도 임도랑을 잘 따랐고 일전 개를 산책시키는 그를 유심히 보던 은행나무 집 마나님이 손수 그를 지목했던 거다. 라마를 산책시키며 도랑의 인생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보름치 일하고 받은 하얀 봉투에는 5만원짜리 신권 40장이 빽빽하게 들어있었다. 웬만한 대기업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도랑은 곧장 신세지던 역할대행 사무소에서 나와 오피스텔을 하나 얻었다. 이제 자신의 삶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도랑이 깊었던만큼 다시 오를 산도 높을 것만 같았다. 역할대행사무소 사장 삼손은 그런 그를 보며 불안한 눈빛을 보냈지만 도랑은 그런 그의 마음이 건강한 질투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직 라마는 다섯 살밖에 안됐고, 라마만 오래 잘 살아준다면 비록 계약은 안했을지라도 고정수입은 계속 들어올 것만 같았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루저로 시작해서 루저로 끝나는 이야기다. 주인공도 루저고 등장 인물 모두가 루저다. 승리감을 느끼며 원하는대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그럭저럭 시간을 버티며 살아간다. 상처가 누르는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루저, 죽을 용기가 없어 그냥 동지를 만나 위안을 받고 견디는 루저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인물들이다. 주인공이 사실은 위너였는데 잠시 루저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그래서 잠깐 동안 다시 위너로 격상하는 것 같지만 결국 루저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끝까지 루저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 담긴 메시지가 지구는 루저들의 세상, 이런 건 아니다. 다들 상처 입었으면서도 알아서도 치유하고 서로 의지하면서도 치유하고 시간으로도 치유하면서 살아간다,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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