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처절한 정원

gowooni1 2012. 4. 15. 23:35

 

 

 

 

이야기의 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의 눈으로 펼친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는,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교사 주제에 사람들을 웃기는 어릿광대로 그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나는 아버지가 해대는 광대짓이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다.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아버지는 주말이나 시간이 나는 날, 그러니까 모처럼 가족들끼리 나들이라도 나갈 수 있는 날에도 온전히 그 바보짓을 해대느라 가족들에게마저 희생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광대짓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얼마든지 달려갔지만 보수를 받지도, 하다못해 여행 경비를 받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어릿광대짓은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삼류 예술가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아버지 말고도 가스똥 삼촌이나 숙모 니꼴에게도 썩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삼촌 부부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낙천적이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숙모는 통통했고 잘 웃는 여자였고, 삼촌은 전기공으로 일하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그런 어느날 아버지의 광대짓, 삼촌 내외에 대한 은근한 경멸을 한 번에 뒤바꿀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가 우스꽝스러운 분장 뒤에 감추어놓은 자기속죄의 서글픈 가면을, 전기공으로 살아가면서 덤으로 얻은 삶에 경의를 표하는 삼촌을, 푼수처럼 잘 웃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쾌활하게만 보였던 숙모 니꼴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스무살이었던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은 나치에 협력하던 비시정부 체제에 대한 반감보다는 그저 멋있게 보이려는 젊은 치기에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가입한다. 왠지 레지스탕스 요원이라면 멋있어보였으니까.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임무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축제라도 하는 듯 신나는 기분으로 아빠와 삼촌은 첫 임무를 맡았다. 기차역에 설치된 변압기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는데 이 일은 보기보다 쉬운 임무였다. 아빠와 삼촌은 두에 역에 가서 변압기에 폭탄을 설치한 다음 마음 편하게 여자친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치가 들이닥치고 아빠와 삼촌, 그리고 또 다른 인질 두 명이 끌려갔다. 숲 속 한가운데 커다랗게 파인 구덩이에 처박힌 네 명은 프랑스말을 할 수 있는 독일군에 의해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듣는다. 변압기 폭파범이 자수를 하지 않으면, 얼마전 통과된 법률에 따라 인질이 대신 죽게 된다는 것. 그러니 하늘에서 기적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한 구덩이 속 네 명은 꼼짝없이 죽게 될 상황이었다. 바로 그들 중 두 명이 진짜 범인인데 누가 자수를 하고 누가 그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인가.

 

구덩이에서 남은 72시간 동안 네 명은 꼼짝없이 총살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도 사람인지라 배고프고 졸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자기만 살기 위해 서로에게 자수를 종용한다. 너희들이 진범이라고 말하면 적어도 우리는 살지 않겠느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로 서로에 대한 불신, 나아가 인간성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간다. 그런 그들에게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구덩이를 지키고 선 나치의 보초 베르나르 비키였다. 어쩔 수 없이 나치의 군대에 속해있는 자신의 처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그자는 그들에게 적어도 인간성을 포기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베르나르 비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삼일간의 식량을 저글링을 하다 실수로 떨어뜨린 것처럼 그들에게 나눠주고, 죽음의 공포에 지친 그들에게 어릿광대짓을 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구덩이 속 네 명은 시간이 지나면 죽을 운명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나치들이 다시 나타나 네 명이 있는 구덩이에 삽으로 흙을 파 던지기 시작한다. 총살이 아니라 생매장을 하려는구나 싶어 인질들은 소리를 꽥꽥 지르기 시작하는데, 베르나르 비키가 위에서 외친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구해주려고 하는데 사다리가 너무 짧아 바닥을 메우는 거라고, 침착하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제 산 목숨이다. 영문도 모르고 트럭에 올라 어째서 자신들이 살 수 있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어제 진범이 잡혀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의아했다. 자신들이 진범인데 대체 누가 목숨까지 내놓으며 자수를 했다는 말이지? 궁금한 게 투성이었지만 그들은 바로 자기 대신 죽은 자들을 찾아나설 수 없었다. 곧장 수용소로 배치되어 강제 노동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수용소에서 탈출을 하고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와 삼촌은 진범이라 자수한 자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들을 구하고 총살을 당한 자는 바로 두에 역의 전기공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이 두에 역 변압기에 폭파물을 설치하는 걸 아직 퇴근하지 않고 일하다 지켜본 그는, 그들이 떠난 후 변압기를 살펴보러 갔다가 그만 변을 당했다. 바로 앞에서 폭파물이 터졌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는 곧장 동료들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결혼 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젊은 부부에게 터진 날벼락이었다. 전기공의 아내는 나치에 협력하는 비시 정부의 뜻대로 놀아나지는 않을 거란 당찬 신념을 가진 여자였고, 개인적인 복수에 연연하느니 남편을 죽인 진범이긴 하지만 프랑스라는 대의를 위해 일하는 레지스탕스 요원들을 살리기로 했다. 어차피 남편은 얼마 안 가 죽을 목숨이었고 남편의 동의를 얻어 자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나치들은 전신 화상으로 목숨이 넘어갈 판인 전기공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총살했고,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삼촌은 풀려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이 찾아간 날, 전기공의 아내는 두 눈을 글썽이며 마치 오래 전 헤어진 피붙이를 만난 것처럼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녀는 삼촌과 결혼했다. 바로 그녀가 숙모 니꼴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숙모를 바라볼 떄마다 짓곤 했던 애틋한 얼굴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시 정권 아래서 나치에 협력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수용소로 보낸 전범 모리스 파퐁이 죄의 대가를 물기 위해 법정에 선 것은 그의 나이 89세 때였다. 친일 정권의 친일파에 대한 단 한 명의 처형도 없이 흐지부지 넘어간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프랑스는 다르게 처신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에 대한 처벌은 시효가 없으며 언제든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공표했다. 모리스 파퐁은 지긋한 나이에 법정에 올라서서도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라 발뺌을 했고 그 말에 수많은 유족들이 울었다. 어쨌거나 감옥에 갇힌 그는 남은 여생을 거기서 보내야 할 판이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났고, 머지 않아 고령에 의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9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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