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죽음의 수용소에서

gowooni1 2012. 6. 11. 23:20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몇 안되는 행운아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행운일까? 누이만 제외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전부 죽어버린 그 상황 속에서 단순히 살아남는다는 것만이 전부일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분명 살아돌아온 건 행운일 수는 있지만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원래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거기에서 겪은 경험들을 나중에 직업적 관점을 도입하여 상세히 기술한다.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수용소에 들어간 직후, 수용소에서의 삶,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그리고 내용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이 대부분이다.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의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 1기, 수용소에서의 삶에 적응해 어떤 외부적 반응에도 무덤덤해지는 2기,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 익숙해진 정신과 상관없이 갑자기 온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3기.

 

1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행운아다. 감시관의 눈짓 하나에 갈린 10퍼센트의 사람들만이 노동에 적합한 사람들로 분류된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1/25인분의 막사에서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해야 하는데 첫날엔 나머지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한다. 자신들보다 더 깨끗하고 공간이 넓은 막사로 배정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니면 더 편한 노역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배정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막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의 친구는 아마 저 연기가 되어 하늘로 가고 있을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경악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고 해서 삶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환경이 굳이 자살을 할 의지를 내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강제 노동의 삶, 인간 이하의 삶,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음식으로 살이 살을 먹는 삶,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한오라기도 품을 수 없는 삶이 매일 일정 수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굳이 자살을 하려하지 않아도 더 살 의지만 놓아버리면 저절로 죽을 수 있는 아주 '편안한' 환경이다.

 

수용소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면 이제 사람들은 웬만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무덤덤해진다. 아무리 잔혹한 구타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가혹한 형벌이 주어지고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온전히 몸뚱아리 하나 남은 시간 속에서 생각하는 거라곤 늘 먹을 것 생각 뿐이고 오늘 하루의 노동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가 뿐이다.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행복은 상대적일수밖에 없다. 지적 노동자가 외부에서는 내 목표와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얻던 고차원적인 행복은 사치는 커녕 꿈도 꿀수 없다. 죄를 지어 일정 기간만 감옥에 있으면 되는 진짜 죄수들의 꿈꿀 수 있는 미래가 부러워진다. 카포의 호의를 얻어 몰래 빵 한조각 더 얻어먹을 수 있는 동료가 부럽고 어쩌나 담배 한개비를 얻으면 행복하다. 저녁에 불이 나가지 않아 이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 행복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지극히 주어진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빅터 프랭클은 단 하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권리. 그것만이 인간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척도이고 인격의 고결함을 시험할 수 있는 경우이다.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이냐를 제외한 모든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주어진 환경을 비관하고 낙담하며 좌절하다 죽어가거나 괴팍스러워질 수도 있지만 진정 고결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긍정적인 반응요소를 잃지 않는다. 유머를 하나라도 더 생각해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한 기분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했던 사람이나 순간을 떠올리며 내적인 행복감을 잊지 않는다. 이때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느냐 살았는냐는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던 경험의 존재 여부만이 진정 수용소에서의 삶을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는 삶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 따른 삶에 의미도 한 번 곰곰히 되새겨볼만 하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인간 존재로서 더 이상 겪을 수 없는 최악의 시련이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련을 경험으로 바꾸지 못하는게 끔찍하댔고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수용소의 시련을 겪고나서 신 이외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느낀 것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다. 시련은 남들 눈에 비췄을 때 별로 그들이 부러워하지 않을 경험 혹은 나는 피해가서 다행이라 할 경험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경험이고 나를 더 성장시켜주는 어떤 절대적 존재의 뜻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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