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여인이라는 다소 북유럽하고도 러시아적인 단어 때문에 이국적 배경을 기대했다면 독자의 기대를 짓밟아버리는 저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대부분 대한민국이고, 그것도 처음엔 옛날 해방과 전쟁의 기운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되어 가난하기 그지없던 시절 부산 광복동 끝자락이다. 리투아니아와 부산, 금발의 소녀와 60년대 부산 동네처럼 어울리지 않기론 뒤따를 것이 없어 보이는 조합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릴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아 잘 알고 있던 금발 여자아이가 하나 있는데, 알고 있었단 말은 서로 얼굴을 트고 지냈다는 말이 아니라 금발 여자아이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모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외국인 여자 아이를 보기 힘들었던 시절 주인공은 그 소녀를 마음 속으로 금발의 제니라고 별칭을 지어 불렀고 학교에 오가는 길마다 제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스쳐지나가듯 보곤 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쓰는 아버지와 서양색이 완벽한 어머니로 이루어진 가족이라 호기심 많은 주인공의 레이더를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완벽한 금발에 파란눈의 소녀가 구성진 부산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도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제니가 함께 놀던 또래 여자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걸 목격했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들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마추어 극단에서 연출을 맡게 된 주인공은 무대 음악을 담당해 줄 직원을 구하다가 다시 한 번 제니와 만난다.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를 둔 데다 리투아니아 민속 음악에 대한 조예가 적어도 남들보다는 월등히 나을 제니, 한국식 이름으로는 혜련인 그녀에게 무대 음악을 맡기고 둘은 이제 같은 목표를 향하는 동료이자 선후배 관계로 함께 하게 된다. 주인공은 다시 만난 혜련에게 반가움을 느끼긴 하지만 둘은 단순한 동료 이상 감정이 발전하지는 않는다. 기르던 닭은 잡아먹지 않는다는 이상한 철학에 철저히 따르고 있던 주인공. 둘이 함께 한 무대가 끝나고 혜련의 송별회 겸 뒷풀이로 연 회식에서 처음으로 혜련이란 사람이 존재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된다.
혜련의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리투아니아가 있었다. 혜련의 외조부모와 어머니가 탄생한 리투아니아. 마지막까지 소련의 위성국가이자 지리적 위치로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끔찍했던 역사적 상황들로 인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혜련의 외조모는 혜련의 엄마만 데리고 몰래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에서 자란 엄마는 성악을 전공하였는데 학교 축제 때 부르던 아리랑 때문에 한국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혜련의 엄마가 부른 아리랑을 듣고 서럽게 울어 제끼던 동양 남자에게 다가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물었다가 부부의 연으로 이어지고 혜련과 그 형제를 낳아 한국으로 건너왔던 것이다. 그제야 주인공은 어째서 그 옛날 혜련의 가족이 부산에서 터를 잡고 살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푼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르고 이제 둘은 서울에서 또 비슷한 우연으로 만난다. 서울에서 연출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부산 광복동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가 아니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아무런 돈을 벌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혜련은 구원처럼 다가온다. 마침 주인공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연극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혜련의 음악이 가미되면 더욱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혜련도 나름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무대가 성공하면 경력에도 좋을 것이었다. 또 한 번 함께 무대를 준비하면서 주인공은 혜련이 한국인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오는 걸 느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혜련은 마치 자신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이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등장인물들도 나이를 먹어가고 상황도 바뀌고 배경도 바뀐다. 겨우 노총각 딱지를 떼고 결혼을 하여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낸 주인공도 결국 파경을 맞고 그 사이 혜련도 남편과 이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무참히 깨져버린 결혼생활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신없는 연출인생을 전체적으로 돌이켜보고 재충전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한 주인공. 그는 거기에 7개월간 되지도 않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지만 떨어져버리고 만다. 한국으로 돌아가봤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왕 미국까지 간 김에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공연들이나 실컷 즐기다 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어느 날 극장가에서 혜련을 만난다. 늘 우연으로 만났지만 마치 어제까지 얼굴 보다 헤어진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그들. 이제 다시 리투아니아 여인과 한국 남자는 브로드웨이 극장들을 전전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지금껏 오래는 알고 지내왔지만 그렇게 오랜기간 연속으로 함께 있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라 주인공은 자신이 몰랐던 혜련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리투아니아 여인의 실제 모델이 누군지 진작 눈치챌 단서들이 작품 여기저기 흩뿌려 있다. 60년대라는 옛날 부산에 살았던 외국인, 게다가 한국인 아버지 덕분에 부산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 리투아니아 피를 가지고 있는데다 무대 음악을 감독하는 여자, 한국 명성왕후 뮤지컬의 감동을 극대화할 음악을 만들기 위해 최적의 음악 녹음 시설을 구비한 외국에 날아가 음악을 준비해 온 코카서스 혈통의 여자. 바로 리투아니아 여인은 박칼린이다. 93년에 그녀와 함께 외국에 다녀올 일이 있던 이문열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소설화 하겠다는 마음을 품은 지 18년이 지나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다. 리투아니아 여인과 주인공의 관계가 범상치 않은데다 주인공에 작가의 모습이 상당히 겹쳐서 설마 진짜로 그들이? 하고 의심도 들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 순수 문학으로 읽어달라는 작가의 구구한 당부까지 첨부되어 있을 정도다. 실제 모델의 유명세에 타격을 입히지 않으려는 소소한 배려이긴 한데 그때문에 왠지 흥에 반감될 정도로 설득력과 재미와 서사를 겸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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