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을 읽을만한 인내력과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라 조정래의 작품을 읽어볼 생각도 못했는데 만약 그래도 한 권짜리 장편이라면 읽을만 하겠다 싶어 집은 작품이 『황토』다. 지면 상의 제약 때문에 중편으로 그려졌던 소설이지만, 내용이나 스케일 면에서 장편을 구상했었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시 쓰였다. 원래 장편인 글감을 중편으로 줄여써야만 했다면 그가 원래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의 분량이란 어느 정도일지, 그 감이 궁금해서라도 읽게 될 만 하다.
황토가 원래 70년대 경에 지어진 작품인데다 작가가 40년대 생이라 그런지 요즘 작품들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비유나 생각들이 나온다. 결혼 안한 여자가 지녀야 할 절대적인 처녀성, 여자는 남자들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몰라야 된다는 사고 같은 것이 요즘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로서 제법 신선하다. 등장인물들은 전부 옛날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주인공은 그런 문화에 반항할 생각을 하기는 커녕 거기에 주눅들고 압도당한다. 요즘 소설들의 주인공이 기존 세력들에 대한 반항세력으로 대치되어 그려지는 데 반해 황토의 주인공 점례는 기존 세력에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순응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하는 일대기로 그려진다.
점례는 해방할 무렵 막 열 일곱이 넘은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과 탐스러운 허벅지를 가진 그녀는 때만 잘 만났으면 곱게 시집갈 수 있었겠지만 시대가 원수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한 주재소 주임 야마다의 농간에 하루 아침에 왜놈의 첩이 되었다. 야마다에게 팔려간 점례 덕분에 부모는 목숨을 구하고 식구들은 징용을 면제 받았다. 대신 야마다는 밤마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진 방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자세들을 강요했고 점례는 그 방에서 수치심에 휩싸인채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던 날 야마다는 야반도주를 하고 점례에겐 텅빈 집과 젖먹이 아들만 남았다. 야마다는 끔찍했지만 아들은 귀여웠다. 그녀는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채 매일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들의 재롱이 깊어질수록 엄마의 한숨은 깊어져만 갔고 급기야 엄마는 먼 도시의 지주인 큰이모에게 SOS를 요청한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아들을 엄마에게 맡긴 채 큰이모가 사는 도시로 끌려가다시피 한 점례는 거기서 박항구라는 총기 있는 사내를 만나 처녀로 위장하고 결혼을 한다.
박항구와 살았던 삼 년은 점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하고 인간답게 산 시절이었다. 박항구는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즐겨 마시지 않았고 퇴근 후 집에 와서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불러 사상적 토론을 했다. 게다가 그는 자상하기까지 해서 점례가 두 번이나 딸을 낳았을 때에도 크게 기뻐하며 자상한 가장의 모습까지 톡톡히 보였다. 그러나 박항구는 공산주의자였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북을 해버렸다. 이번에도 점례에게 남은 거라곤 작은 집 한채와 4살박이 딸, 젖먹이 딸 뿐이었다.
공산주의자이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던 남편 때문에 점례는 생각지도 않은 고초를 당한다. 온갖 고문과 기구한 운명에 더이상 살 의지를 느끼지 못한 점례는 차라리 이번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터였지만 점례의 예쁜 얼굴은 이 상황에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프랜더스라는 미군 대위의 마음에 들어 목숨을 구하고 이번엔 그의 첩이 된다. 고초 중에 젖먹이 딸은 죽었지만 곧 이 미국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다. 그러나 곧 프랜더스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번에 역시 점례에게 남은 거라곤 작은 집과 프랜더스를 쏙빼닮은 아들이었다.
예쁜 얼굴 덕분에 시대가 짊어준 기구한 운명을 따를수밖에 없었지만,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시대를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이니 스물 일곱의 나이에 아빠 다른 아이 셋은 점례의 인생살이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서 끝나더라면 황토는 오히려 충만한 느낌으로 독자에게 기대감을 안겨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이십여년이 훨씬 지난 시간을 비추며 점례의 인생살이가 결국은 무상함을 보여준다. 야마다의 성격을 판박은 듯한 난폭한 큰아들과 백인의 외모를 지닌 셋째 아들의 깊은 골. 점례는 자신의 인생이 드디어 지고 있음을 느끼며 장남분의 유산을 딸 세연에게 남긴다는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작품은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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