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레이스 뜨는 여자

gowooni1 2011. 11. 21. 21:57

 

 

 

 

파스칼 레네는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유려하면서도 탄탄하고 화려하면서도 철학적인 문체를 구사하여 너무나 보잘것 없던 한 여인의 삶을 예술로 빚어냈다. 작가의 선택을 받은 여인의 이름은 뽐므. 발그스름하고 통통한 볼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몸에 깃든 절대적 수동성을 자랑하는 뽐므의 인생은 소재로 봤을 때 소설로 만들어져야 할만큼 대단한 사건은 별로 없다. 보잘것 없는 소재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예술로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긴 하지만 이 작가의 역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재의 아름다움을 억지로 포착해 예술로 만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철학적인 문체와 중심을 관통하는 현실인식으로 소재의 평범함까지 예술로 승화시켰다.

 

삶이 주는 인색함에 딱히 불평을 하지 않고 그저 딱 주어진 상황에서만 인생을 살아가는 뽐므. 그녀의 인생 사전에 있어 불평 불만이란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 불만을 가진다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할 근거로 작동할 수도 있었지만, 뽐므에게 있어 그런 감정은 오히려 불편한 것이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기분 나빠하기보다 차라리 불만이란 감정을 없애버리고 태고적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방식이야말로 뽐므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세상에 대해 반응 또는 반항을 하지 않는 뽐므의 절대적 수동성은 타인의 눈에 비췄을 때 완전무결한 순수함으로 보였다.

 

뽐므를, 다른 존재들과 섞여 있을 때 눈에 띌만한 여인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은 뽐므가 발산하는 절대무결한 순진함을 감지하고 그녀에게 다가오곤 했다. 뽐므와 개별적으로 우정이나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당연히 먼저 다가가야 했다. 그녀는 절대로 먼저 무엇을 세상에 던질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됐으니까. 뽐므에게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먼저 다가온 사람은 두 명 이었는데, 마릴렌이라는 여성와 미래의 박물관장이 될 고문서학교 남학생이 그들이었다. 마릴렌과 남학생은 모두 처음에는 뽐므의 매력에 신선함을 느끼고 다가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뽐므를 떠났다.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백지 같은 뽐므에게 자신의 색을 덧칠하여 자신만의 친구, 자기만의 애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뽐므의 순결함은 그 어떤 색을 입혀도 더럽혀지지 않았다. 막강한 하양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로 결정된 이 운명에게 사람들은 금방 질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뽐므도 자신의 매력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순진함은 경험이 없는 어린 나이에나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일 뿐이었고, 여전히 세상에 아무것도 반응을 내보이지 않는 뽐므의 수동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답답함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래도 경험치라는 것 덕분에 뽐므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지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신은 신체적으로도 아름답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함을. 이제 뽐므는 점점 자신의 본능에 더욱 충실해진다. 그리고 그 본능은 세상 어느 것에도(심지어 음식까지도) 반응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명령했다. 이제 뽐므는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침몰한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그말은 즉 더 이상 살기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나마 다가오려고 했던 타인들에게 갑갑한 마음을 품게 한 것이 과연 뽐므의 잘못인가? 그게 뽐므의 잘못인지는 판단하기 힘들다. 차라리 잘못이라면 그녀가 생을 대하는 절대적 수동성에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하게 능동적으로 선택한 '생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 조차 세상에 대한 반항에서 기인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 뽐므가 살아가던 방식에 가타부타 논한다는 건 애초에 부질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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