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야간열차

gowooni1 2011. 12. 18. 20:24

 

 

 

 

여행을 가고 싶지만 떠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장치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가 이미 떠난자들의 이야기 즉 여행기를 읽는 것. 여행기를 선정할 때는 다소 고심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여행이라고 여행자들은 자신들이 도착할 장소에 대한 조사나 연구를 어느 정도 하기 마련인데, 너무 해박한 자들의 여행기는 자칫하다간 이해 못하거나 지루해지기 쉽고 너무 모르는 자들의 여행기는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에서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는 게 너무 없었던 나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지루하기 그지 없었는데 뭐 이건 마치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걸 가지고 얼마나 많이 그럴싸하게 버무릴 수 있는지 보자는 실험의 결과물인 것 같았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독자에게 자신의 수준을 따라오도록 강요하는 그 불친절한 문체에 분명 많은 사람은 반하지만, 반발하는 독자라면 외면해 버리면 그만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의 수준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의 소통을 위하여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여행기에 관한 한 에릭 파이가 알랭 드 보통보다 낫다. 에릭 파이의 여행기도 읽다보면 물론 낭중지추라고 박식함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지만 결코 젠체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어릴 적부터 아니 조상 때부터 열차와 뗄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그는 야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종단하고 횡단한다. 자신은 떠날 수 없지만 떠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던 증조부의 원을 마치 자기가 꼭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이라도 했던 건지. 그는 열차 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으로 떠남에 대한 동경은 자연스럽게 키워지는 거라고 말한다. 열차는 그를 저렴한 가격에 유럽의 여기저기를 둘러볼 수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떼제베 같은 운치 없는 열차에게 대놓고 적대한다.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차창 밖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과 함께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속 열차보다는 평균 시속 칠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열차, 그것도 밤 중에라면 호텔 역할까지 톡톡히 해주는 침대칸 있는 야간 열차가 단연 그에겐 최고다.

 

그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에 몸을 싣기도 한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이루크츠크를 거쳐 울란바토르를 지나 베이징에 이르는 여정이 전부 열차에서 진행된다. 그는 시베리아 대평원을 보고 조물주를 영감이 고갈난 예술가에 빗댄다. 영감이 떨어져 매번 똑같은 것만 창조해내는 예술가처럼 조물주도 지구를 만들다 영감이 바닥나 똑같은 풍경만 빗어내야 했다는 거다. 하도 똑같은 풍경만 보여 차창 밖의 광경이 사실은 같은 무늬의 벽지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시베리아 대평원은 같은 모습의 연속이란다.

 

하여간, 에릭 파이의 야간 열차는 떠남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까지 상냥한 대리만족을 안겨준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열차 안에서 자신보다 정확히 100년전 같은 열차를 탔던 자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 자신의 야간 열차를 읽을 독자를 배려해 가능한 한 상세히 풍경과 감상을 적어놓으려 했다는 작가의 친절함 혹은 당치 않은 포부-과연 자신의 글이 100년 후에도 남아 사람들에게 읽힐 것이라 장담하는 대담찬 작가가 있을 것인지-에 살짝 웃음을 머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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