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gowooni1 2011. 10. 13. 23:30

 

 

 

 

주인공은 모텔을 전전하는 도시 여행자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를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마음 내키는대로 발길 머무는대로 돌아다닌다. 저녁이 되면 모텔에서 자고 하나밖에 없는 속옷은 빨아 다음날 다시 입는다. 벌써 그런 여행을 삼 년이나 해왔다. 모텔 여행자라 하면 집 없고 돈 없어 간간이 살아간다는 감이 없지는 않은데 만약 그걸 삼 년이나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주인공이 경제적으로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다. 서울에 마당 있는 사십 오평짜리 단독 주택을 놔두고 모텔을 선택한 것은 단지 집에 있으면 너무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폐쇄공포증인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모텔에서 잔 순간 그렇게 아늑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심신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모텔을 선택한 주인공이다.

 

그를 더욱 특이한 여행자로 만드는 것은 함께 여행을 하는 와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안내견으로 입양되었던 골드 리트리버 와조는 이제 자신이 맹견이 되어버렸다. 이 신체적 상황을 극복하고 주인과 함께 긴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이 개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보좌하지 않으면 안되는 성향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와조 때문에 모텔 여행자에게 도시를 여행하는 것에서부터 모텔을 잡는 것까지 모든 과정은 녹록치 않다. 지하철을 탈 때 개에겐 안내견임을 알리는 옷을 입히고 주인공은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 모텔을 잡을 땐 개에게 호의적이진 않더라도 덜 적대적일 것 같은 곳을 골라야 한다. 어렵게 방을 잡은 후엔 작은 승리에 대한 승전식이 있다. 하룻밤의 시간을 보낸 방 화장실의 수면대 아래 네임펜으로 작은 흔적을 남기며 돌아다닌다. 몇월 몇일 나와 와조 왔다 감.

 

가짜 맹인 행세를 하며 아무 목적 없이 지하철을 탄 어느 날, 주인공은 이상한 여자를 목격한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면서 파는 물건은 오직 한종류의 소설책 뿐이다. 책을 가득 실은 구르마를 끌고 다니며 책을 꼭 사서 읽어보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지만 아무도 사는 사람은 없다. 주인공이 와조를 데리고 다시 역에서 나와 맹인 행세에서 벗어나려는데 여자에게 뒤를 밟히고 만다. 너 사실은 맹인 아니지? 여자는 이상하게 이 커플에게 관심을 보인다. 귀찮아하는 주인공을 쫓아오며 개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사유를 듣고 싶어 안달이다. 여자를 떼어낼 수 없는 이유는 빈약하게도 돈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수중에 당장 돈은 없는데 배도 고프고 오늘 밤 잠 잘 곳도 필요했다. 여자는 돈을 빌려주고 주인공에게서 이야기를 집요하게 캐낸다. 그렇게 셋의 여행이 시작된다.

 

여자가 지하철에서 파는 책은 자기가 직접 쓴 책이었다. 자기가 쓴 책을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며 파는 소설가라니. 여자는 작품을 하나 끝내면 그 책을 팔러 돌아다니며 세상을 구경한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을 마케팅 하면서 다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야기를 구상한다는 여자의 사정에 주인공도 조금씩 마음이 열린다. 남자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사실 자기가 서른이 넘은 백수이긴 하지만 한때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달해주는 사람이었다고.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본 적이 없어 자기는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는 거라고. 그들에게서 답장이 오면 여행을 그만 둘 생각이지만, 아직 집으로 배달된 편지가 하나도 없는 모양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계속 여행을 하며 편지를 쓰는 거라고.

 

소설가는 반박한다. 요즘 세상에 이메일을 쓰지 누가 손으로 편지를 쓰겠냐는 것이다. 만약 편지를 받더라도 자기라면 손으로 답장을 쓰고 우체국 가서 부치는 게 귀찮아서라도 생략하겠다고 핀잔을 준다. 진짜 답장을 받고 싶다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라고, 이메일로 편지를 쓴다면 너가 그토록 원하는 답장을 쉽게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충고도 한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매일 밤 모텔방에서 잠을 자기 직전 편지를 쓴다. 여행중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쓰고 가족들에게도 쓰고 친구들에게도 쓰고 와조에게도 쓴다.

 

이야기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흐른다. 편지를 쓰는 상대가 늘어나면서 주인공이 받은 마음의 상처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어째서 모텔을 전전하는 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과거들. 여전히 편지는 오지 않고 경비는 떨어져가는데 그의 여행은 와조로 인해 끝이 난다. 너무나 늙은 와조는 더이상 여행할 체력이 남지 않아서 수의사는 개를 위해서라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늙고 병약하고 지친 와조를 품안에 꼭 안고 택시를 타고 3년간 찾지 않은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와조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마치 지금 이순간을, 집으로 돌아와 생을 마무리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무도 없는 집, 트라우마만 가득한 집에서 주인공은 이웃집 아주머니로부터 묵직한 상자 한박스를 받는다. 거기엔 지금껏 자신이 썼던 편지에 대한 답장들이 가득하고, 그것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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