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니 집안이 텅 비어 있다. 함께 살았던 인도 애인이, 모아놓은 현금다발은 물론 가재도구까지 전부 들고 도망가 버렸다. 망연자실한 가운데서도 할머니의 유품인 겨된장 항아리만은 남아있다는 사실에 겨우 감사하며 링고는 그 항아리를 안고 집을 나온다. 어차피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사에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다. 집주인에게 들러 열쇠를 반납하고 남은 동전을 탈탈 털어 고향으로 가는 심야 버스표를 하나 산다.
링고는 열 다섯 살에 집을 나온 후 십년 동안 한번도 집에 간 적이 없다. 술집 아무르 마담인 엄마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혼자 독립해 산다는 것이 별로 문제된 적은 없다. 엄마가 비상금 두는 곳을 잘 알고 있어서, 이번에도 그 돈만 발견하면 엄마 몰래 돈다발을 들고 도망갈 작정이었다. 은행을 믿지 않는 엄마는 늘 샴페인 병에 현금을 넣어 집 뒤 텃밭에 묻곤 했는데, 그 돈을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볼 작정이었다. 엄마가 키우는 애완 돼지 엘메스가 이방인의 침입을 감지하고 맹렬히 달려오기 전까지는. 엘메스의 공격과 갑작스런 소란에 낫을 들고 나타난 엄마에게 들키고만 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링고는 엄마 집에 얹혀 살 수밖에 없게 됐다.
엄마와 딸은 거래를 한다. 딸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대신 엘메스를 돌보는 것, 그리고 일을 해서 얼마만큼의 숙식제공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인구 오천 명의 작은 산간 마을에서 일할 만한 장소는 마땅치 않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요리 뿐이라는 것을 또 느끼고 특기이자 소명을 살리기로 한다. 엄마에게 높은 이자를 쳐서 자금을 빌리고, 사용하지 않는 창고를 개조해 식당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원래 식당 개업은 도망간 인도 애인과 함께 차리기로 했던 오랜 꿈이지만 이젠 혼자라도 문을 열어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된다. 한 달 간의 구상과 인테리어 작업을 거쳐 드디어 오픈 초읽기에 들어갔다. 간판엔 달팽이식당이라는 이름을 손으로 썼다.
달팽이 식당의 원칙은 손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요리를 제공하기. 특별한 메뉴판도 없고 테이블은 하나뿐이며 손님은 하루에 한 팀만 받는다. 예약한 손님을 사전에 면접하여 먹고 싶어하는 것이나 사정들을 파악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최상의 요리를, 시골 마을에서만 조달할 수 있는 최고급 재료들을 이용하여 마음과 정성을 담아 만든다. 과거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마음과 요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경건함을 살리기 위해 허리까지 왔던 긴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버리고 두건으로 머리를 두른다.
달팽이 식당을 읽는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요리 하는 과정을 마치 장시처럼 묘사한 부분들이다. 요리를 할 때마다 요리의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링고의 마음, 아름다운 단어들을 조합하여 그려낸 요리 과정, 해박하기 그지없는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지식은 작가 자신이 얼마만큼 요리를 좋아하고 많이하고 즐기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요리라는 것을 작가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로 빚어낸 작품, 달팽이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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