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철수 사용 설명서

gowooni1 2011. 9. 12. 02:15

 

 

 

 

철수는 이름만큼이나 대한민국의 표준 사양을 가지고 있다. 나이 스물 아홉살, 지방 국립대 졸업 후 취업 준비중, 몇 번의 연애 경력은 있으나 아직 결혼할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음, 일단 취업을 하고 봐야 함, 남자, 그 나이 부모님과 얹혀 사는 사람 특색으로 눈치를 봄. 약간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선생님한테 손등을 맞은 트라우마로 대인과 거리가 가까워지면 심하게 열이 나며 덕분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 해보지 못했음, 진실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 앞에서 늘 도망치는 바람에 동정을 떼지 못함.

 

철수 사용 설명서는 변변찮은 대학을 졸업한 철수가 취업 시장에 자신을 내놓았으나 잘 팔리지 않은 관계로, 자신에 대한 스펙(스페이피케이션, 즉 사양)을 상세히 기술하여 적합한 소비자의 선택을 도모하고 자신의 안정적인 영위를 도모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설명서다. 제대로 된 영어 점수도 없고 높은 학점을 가지지도 못한 철수는 졸업 후 취직을 시도하지만 고스펙 소유자들이 판을 치는 시장 앞에 맥을 못추고, 점점 유통기간이 만료되어가지만 아직 팔리지 않은 애물단지로 전락해가는 과정에 처해있다.

 

철수는 그냥 보통 대한민국의 남아일 뿐이다. 약간 소심해서 여자들과 진지한 관계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점이 약간 특이하지만 제법 연애경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연애 사건이라는 것은 상방 필요하에 성립되었던 관계였다. 취업시장에서 물만 먹는 철수가 연애시장에서는 아직도 쓸만하다는 걸 스스로 납득시키며 안정감을 되찾고, 상대방 여자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남자친구 있다고 어디가서 내세울 수 있는 정도가 되는 철수에게서 악세서리의 기능을 발견했다. 그런 상태의 연애라는 것이 진지한 사랑을 바탕으로 시작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는 사양을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보고 판가름 하는 시대에 취업시장이나 연애시장이나 사정은 모두 매한가지다.

 

취업 모드에서도 연애 모드에서도 시원찮은 철수는 당연히 아들 모드에서도 시원찮을 수밖에 없다. 어디 가서 아들이 어느 회사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부모님은 철수를 보면 답답하다. 거기다 철수는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다. 한술 더떠 철수는 왜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제대로 된 아들 녀석인 줄 알고 삼십 년을 끼고 살았는데 경제적 능력도 아직 없고 사랑의 능력도 없고 더불어 부모 부양 능력도 없는 이 현실이 그들 부모에게는 이런 식이다. 우수한 완제품인줄 알고 샀는데 썩 성능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런대로 쓰고는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누락된 성능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더라.

 

철수 사용 설명서는 대한민국 이십대 청춘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다. 철수를 게임 상 등장하는 하나의 캐릭터로 보고 캐릭터를 판매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구매자의 퀘스천에 답을 하는 형식을 간간이 섞으며 엮어진 구성이다. 철수는 여러가지 모드로 동작을 할 수는 있으나 모든 모드에서 완벽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고성능 제품은 아닌 걸로 묘사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된 채 시장에 내놓인 상품이라는 단순한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엔 뚜렷한 스토리 대신 여러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더 있다. 평범한 대한민국 이십대 청년의 통쾌한 인생역전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특이한 관점에서 지켜보았다는 것에 기발함의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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