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엄마 집에서 보낸 사흘

gowooni1 2011. 9. 13. 11:15

 

 

영화를 다섯편 찍고 열 권의 소설을 낸 오십대의 잘 나가는 작가인 나-프랑수아 베예르그라프-는 요즘 위기의 재정상태에 빠져있다. 벌써 오년째 책으로 출판할만한 글을 쓰지 못했는데 출판사에서 받은 선인세는 다 써버렸고 국세청 직원으로부터는 세금 독촉전화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쓰고 싶은 주제들은 항상 있었다. 문제는 시작하고 싶은 장면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하겠는지 모르겠다는 것에도 있었고, 자신이 쓰려고 하는 글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하는 회의감에도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 경제적 상황과 그 와중에도 엄마에 관한 글을 써야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등등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여러 고충들이었다.

 

여섯 남매, 누이 다섯명에 오롯한 아들이라는 위치로 나는 엄마에게 항상 그립고 애틋한 자식이다. 엄마는 늘 나에게 말한다. 언제 한 번 들르렴, 단 네가 글을 쓰는데 지장이 생기지 않는한. 엄마는 누구보다 아들이 자신의 집에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자신의 바람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아들이 오래토록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기를 바란다. 물론 열 여덟살이란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집을 나와 세상을 돌아다닌 아들은 엄마의 집에 머물 시간을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언제나 '이번 작품을 끝낸 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태어나 자란 곳으로 돌아가기를 유예하지만 작품을 끝내기는 커녕 제대로 된 시작을 오년 째 못하고 있다.

 

엄마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이미 고인이 된 경쟁자가 있던 이유다. 글을 쓰다가 죽은 아버지는 벌써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두 권의 책을 써냈고, 나는 그런 상황 때문에 아버지 살아 생전 은근 '빨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비뚤어진 심리를 우주가 받아들였는지 아들의 책이 세상에 나와 전국 서점에 깔린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죽어버렸고, 이제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특권은 오직 나만의 전유물이 됐다. 살아 남은 자의 특권, 아빠가 알지 못하는 엄마 인생 뒷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여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인생을 살아가는 엄마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약 오년이 지난 후에, 엄마는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엄마는 자신의 새 애인을 자식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했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애인의 자식들과 선을 지킬 줄 아는 신사, 엄마의 목소리를 소녀의 목소리로 되돌려놓은 마술사였다. 그게 새삼 문제될 수 있다면, 프레데릭에게는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아내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는데, 새삼 희망을 말하자면 그 아내는 오랜 병치레로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살 말할 필요도 없이 엄마는 그의 아내가 자신과 프레데릭보다 빨리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엄마보다, 그의 아내보다 일찍 죽은 것은 프레데릭이었다.

 

엄마는 살아생전 자신이 제일 행복했던 시절, 여섯 아이들이 모두 자신을 의지하며 함께 같은 지붕에서 살던 시절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장성한 자식들에게 가정이 하나씩 생기고부터 그런 바람은 꿈으로 머물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왔다. 정원에 핀 장미에게 제초제를 뿌리려다 지상 1미터 높이에서 낙상하고는 여든 여덟이란 신체적 한계로 꼬박 이틀동안 마당에 쓰러져 꼼짝도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엄마의 죽을 고비를 앞두고 드디어 모든 자식들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가 없는 집에서, 나는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오래 머무름을 기꺼이 수행했다. 모처럼 주어진 그 사흘동안 나는 드디어 오년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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