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없이 황폐한 땅을 걷고 있던 장은 드디어 마을을 하나 발견하고는 거기서 묵어가야겠다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이미 오래 전 사람들로부터 버려져 있어서, 있는 거라고는 지붕이 날아간 집 몇 채와 말라붙어버린 우물 뿐이었다. 그러다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는 장을 보고는 말없이 깊은 샘에서 물을 길어 주고 잠잘 곳을 제공해준다. 엘제아르 부피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아무도 없는 마을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모습이라면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과 달리 부피에는 물 샐 염려 없는 튼튼한 지붕 아래에서 소박한 가구들과 잘 닦여진 마룻바닥에 둘러싸여 보통의 깔끔하고 말쑥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오랫동안 혼자 사는 중이었기 때문에 마치 고독과 체화된 것처럼 보였다. 장은 부피에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으므로 오랫동안 그 곳에 머물렀으면 싶었고 그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만약 장이 당장 그 집을 떠난다 했더라도 부피에는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미 그 어느 것도 그의 차분함을 흐트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고독하면서도 흔들림없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 그가 어떤 사정으로 혼자 양을 치면서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꽤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온 모양이었다.
부피에가 살아가는 방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생업으로는 양을 치며 지냈고 사업으로는 나무를 심는 게 전부였다. 기다란 쇠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땅에 깊은 구멍을 낸 다음 도토리를 심었다. 하도 많이 심어서 도대체 얼마나 이 일을 해왔는지 물어보니, 지금껏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었고 거기서 2만개의 나무가 자랐고, 각종 재해를 고려했을 때 1만개의 나무 만이 살아남는다 해도 결과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의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행동 때문이었는데, 황무지는 부피에의 땅이 아니었고 먼 훗날 그가 심은 도토리들이 자라 숲을 이루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었다.
이미 부피에의 나이는 쉰 다섯이으니 자신이 심은 도토리들이 싹을 틔워 자란 나무들의 열매와 그늘의 달콤함을 기대하기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부피에의 사업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있어 황무지를 숲으로 바꾸는 일은 먹고사는 일을 떠나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이었다. 언제까지 나무를 계속해서 심을 거냐는 장의 물음에 부피에는, 앞으로 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려줄 지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시간이 존재한다면 그건 나무를 끊임없이 심으라는 신의 계시인 셈이라 답을 한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고독한 남자 엘제아르 부피에는 세상의 혼돈에 아랑곳없이 언제나처럼 묵묵하게 나무를 심고, 장은 그 사이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상의 혼란을 몸소 겪는다.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엘제아르가 그리울 때 장은 언제나 처음 그를 보았던 장소로 가고, 그는 그곳에서 반경 몇 십 키로가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늘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부피에의 나무심는 사업은 삼십 년이 지속되었다. 지독하게 변덕스러운 정세 속에서 프랑스 당국이 내린 썩 괜찮은 지침은, 신기하게도 혼자 자라는 이 숲에 대한 벌채를 엄금하는 것이었다. 하도 고독하게 살아 말년엔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엘제아르 부피에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아무도 살지않던 황무지였던 그 자리엔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겼으며 만여 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었다. 그때 부피에의 나이 여든 일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