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영화-MOVIE

마루 밑 아리에티

gowooni1 2011. 8. 18. 21:56

 

 

한 눈에 봐도 도시에서 곱게 자랐을 것으로 보이는 소년 쇼우는 어느 여름 한적한 시골의 친척집에 머물러 온다. 하얀 피부와 차분하고 낮은 말투에 좀처럼 놀라는 일 없는 쇼우의 고상한 특성은 안타깝게도 병약한 체질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장이 약해 수술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하여 수술 후 요양을 하러 내려오는 길이지만 정작 쇼우 본인에게는 그 일이 대수롭지 않다. 부유했지만 이혼한 부모님은 쇼우의 심장 수술 소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소년 역시 자신의 건강에 별로 흥미가 없다. 오히려 수술을 하다가 살아나지 못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냉정하고 담담한 쇼우였다.

 

 

시골의 이층집은 오래 된 가옥이라 수풀이 무성하고 운치있는 곳이었는데, 막 차에서 내린 쇼우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인간이 풀숲 이파리 아래에서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하지만 요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쇼우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어떠한 의심이나 놀라움도 없이 가만 입을 다문다. 이층 구석의 작은 방이 앞으로 쇼우가 머물게 될, 아니 늘 누워있게 될 공간이었고 쇼우는 말없이 자신의 방에 머물러 들어간다.

 

 

쇼우가 본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장 10센티미터 안팎의 작은 인간 아리에티였다. 이제 막 14살이 된 아리에티는 가끔 세상 구경을 나가곤 했는데 하필이면 그 때 쇼우의 눈에 들키고 만 것이었다. 몸만 작다 할 뿐이지 인간의 의식주와 똑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그들은 인간들의 물건을 빌려 쓰는 종족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띄면 당장 그곳을 떠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마루 아래에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들고 가끔씩 인간들의 물건을 조달해다가 쓰는 것이 그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쇼우의 눈에 들킨 줄도 모르고 아리에티는 아빠한테 자신이 어른이 되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한다. 보통 물건을 조달해오는 것은 아빠의 몫이었는데 그 작업을 함께 나서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종의 목숨을 건 사투와 다름없었다. 굵은 빗방울 한줄기만 맞아도 치명타를 입을만큼 작은 그들에겐, 자신들의 거처만 빠져나가면 모든 것이 적이 되는 셈이었다. 마루 밑에 득실한 바퀴벌레도, 귀뚜라미도 적이었고 인간들이 키우는 고양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천적이었다. 반대로 훌륭한 점도 있었다. 각설탕 한조각이면 오랜 시간 훌륭한 양식이 되었고 허브 잎 하나면 며칠간 훌륭한 차가 탄생하였다. 이번에 아리에티가 아빠와 함께 조달해 와야 할 물건은 두 가지였다. 각설탕 하나와 티슈 한 장.

 

 

못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핀을 첫 전리품으로 주워가면서 설탕을 입수한 그들 부녀는 이제 마지막으로 티슈를 찾아 나선다. 방의 여기저기를 다녀 간신히 티슈를 찾아 뽑아들려는 찰나 아리에티는 그만 온 몸이 얼어붙는다. 티슈 너머로 침대에서 쇼우가 누운채 눈을 뜨고 아리에티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몰래 도망가려는 찰나, 쇼우는 여전히 차분하고도 작은 저음으로 아리에티에게 말을 건넨다.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아리에티와 아빠는 재빨리 자신들의 은신처로 돌아오고 그 와중에 어렵게 손에 넣은 각설탕마저도 떨어뜨리고 만다.

 

 

이제 그들 가족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아리에티가 인간의 눈에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거처를 옮겨야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처럼 작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남은 종족이라곤 이 세 식구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곳은 알지 못하는 위험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고민만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아는 아빠는 살아갈 방법을 연구하러 여기저기 다니고, 아리에티는 자신의 부주의함에 실망하고 무기력해져 얌전히 자신의 아지트에서 시간을 보낸다. 쇼우는 아리에티를 처음 봤던 장소에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각설탕을 놓아두지만 그것을 가져간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쇼우에게 확실히 입증시키는 거나 다름이 없다. 각설탕은 무척이나 아쉽지만, 아리에티는 그것을 무시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에티는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다. 자신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고 보호해주는 쇼우 같은 사람도 있는 반면, 자신들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려 앞으로 살아가기 곤란해지게 만드려고 기를 쓰는 부류도 있었다. 가정부인 하루 같은 사람이 후자 쪽 부류였는데, 엄밀히 말해서 우리 기준으로 하루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아리에티네 가족의 입장에서는 절대악이 되었다. 쇼우의 선과 하루의 악 사이에서 그들의 운명은 갈팡질팡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진양성을 하려는 목적인지 자신의 그림체와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간판은 그대로 두고 감독을 다른 사람으로 설정하여 만든 이 작품은, 얼핏 보면 친숙한 그림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배경 때문에 기존 미야자키의 작품들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다보면 역시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일본 전통 설화와 20세기 초반 유럽 특유 우울한 분위기가 섞여 오묘한 정서를 자아내는 게 미야자키 풍이라면, 아리에티는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명랑한 구석이 있다. 자연과 옛 풍경이 함께 어우러진 아련한 향수를 주는 지브리 스튜디오만의 향기는 그들만의 전매특허로 만들 셈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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