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아옌데 대통령이 실각하고 단번에 피노체트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사벨 아옌데는 망명길에 올라 이나라 저나라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그녀의 소설 속 배경은 늘 국제적이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와 남미를 넘나드는 건 예사였는데 '세피아빛 초상'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등장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대륙이 그녀의 소설 속 배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 그녀는 가장 관대하지만 또한 가장 극단적인 나라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녀에게 상주하는 어떤 한 장소가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녀가 창조해낸 방랑벽 철철 넘치는 작품속 주인공들의 인생을 쫓아가 볼수록 그 궁금증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녀의 전작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세피아빛 초상의 등장인물이 이전 작품 속 등장인물과 상당히 겹친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챈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 과 더불어 세피아빛 초상은 아옌데 3부작으로 통하는데 사실 영혼의 집은 크게 연관성이 없고 운명의 딸의 후속 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영혼의 집은 1982년에 출판되었는데 반해 운명의 딸은 1999년, 세피아빛 초상은 2000년에 나왔으니 작가가 처음부터 세피아빛 초상을 운명의 딸에 이어 쓰려고 구상하고 있었구나 하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운명의 딸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어 이대로 끝이야? 하는 허무함을 느꼈다면 이 후속작품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난 이제 자유로워요, 라는 엘리사 소머스의 마지막 독백으로 끝나는 운명의 딸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칠레에서 영국 귀족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엘리사는 호아킨이라는 애인을 쫓아 캘리포니아로 쫓아오지만 이미 예전의 애인은 도적의 무리로 전락해버렸다. 잘린 호아킨 무리에타의 머리를 보고 나서야 지금껏 자신이 쫓은 애인은 단지 젊은 날의 열망에 대한 집착이었음을 깨닫고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운명의 딸 마지막 부분 스토리다. 세피아빛 초상은 이제 여기에서부터 흘러간다. 늘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타오 치엔과 사랑에 빠진 엘리사 소머스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아직은 보수적인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고려해 정식적으로 결혼을 하지는 못하고 지낸다. 타오 치엔은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리고 엘리사 소머스는 맛있는 케잌 가게 주인으로 삶의 기반을 다져간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생겨났는데 타오의 중국인 피와, 엘리사의 칠레인 피가 섞인 결과는 둘도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은 지나치면 희생인지라 이 여인의 운명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받고 모델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린은, 엄청난 부자 파울리나 델 바예의 망나니 첫째 아들의 희생양이 된다. 단 한번의 관계로 임신을 하였으나 버림을 받은 린. 그녀 역시 딸을 낳다고 죽고 마는데, 이 딸이 바로 스토리의 목소리를 내는 주인공이다. 파울리나 델 바예는 자기 아들의 망나니짓 때문에 태어난 아이에게 집착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가 아이를 내놓으라고 위협을 하지만 돈이나 명성에 주눅드는 법이 없는 차분한 성품의 엘리사와 타오의 보호를 받으며 다섯살까지 외조부 집에서 지낸다. 리밍이라 불리며 지낸 여자아이는 다섯살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파울리나의 손에 맡겨지고, 무엇때문인지 이전의 기억을 잃고 만다. 대신 아우로라 델 바예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릴 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아우로라는 늘 파울리나 할머니에게 자신의 엄마 아빠에 대해서 묻는다. 물론 그 엄청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부자 할머니는,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대주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일체 대답을 거절한다. 하지만 내부에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아우로라는 자아 찾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방편을 찾아낸다. 언젠가 삼촌 중 한 명이 손에 쥐어준 카메라가 바로 아우로라 열정의 발산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열광적으로 사진을 찍어댔는데 풍경보다는 특히 사람들의 진솔한 표정을 포착하는 데에 매료된다. 그런 아우로라의 사진가적 기질을 보며 파울리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자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가서 애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첫번째 의무라고 일축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을 금지시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결혼하게 되는 남편 디에고 역시 여자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며 사진을 계속 찍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관대함은 다행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디에고는 자기 형수 수사나를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고 그 희생양으로 아우로라가 발탁되었을 뿐이었다. 형수를 사랑하느라 여력이 없는 남편은 아우로라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의심을 품은 아우로라가 어느 겨울 날 몰래 남편 뒤를 밟아 쫓아간 마구간에서, 마치 짐승처럼 사랑을 나누는 남편과 시아주버니의 아내를 목격하고 심적 육체적 충격을 받아 한참을 앓는다. 예고된 파경 속에서 무한한 사랑을 나눠주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위태위태한 나날을 걷던 아우로라는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를 받는다. 자신에게 풍족한 인생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던 파우로라 델 바예의 임종이 멀지 않았으니 오라는 전갈이었다. 이로서 잠깐 함께 했던 시댁과의 인연도 끝난다.
라틴 아메리카 다른 작품들처럼 엄청난 사람들이 대를 이어가며 오랜 시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는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만큼 각자가 얽히는 관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창출되고 이것들을 하나도 빠뜨림없이 세심하게 끌어안고 가는 작가의 역량에 탄복하면서 거의 신처럼 보이는 작가의 위치에 매력을 느낀다. 운명의 딸과 세피아빛 초상을 읽으면서 아옌데에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들의 열정이 그녀를 닮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창조해 낸 타오 치엔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작가가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운명의 딸 마지막 장면에 빠지지 않던 타오 치엔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