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황산

gowooni1 2011. 7. 10. 22:50

 

 

 

 

황산에서, 정부는 거의 무정부 상태일 만큼 개입이 없고 법률은 있으나 마나, 대중매체라는 언론이 오히려 힘을 가지고 있는 세계가 나온다. 오직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나머지 한 방송사는 터무니없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 트럭에 태운 뒤 집단수용소에 가두고 노동을 시킨다. 가혹한 육체적 노동을 실컷 시킨 다음 제공하는 건 멀건 스프와 거칠고 작은 빵. 그것을 먹고 버티는 사람은 행운이지만 지나치게 말라 노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거나 쓰러지는 사람들은 곧장 처형실로 직행된다. 포로들을 감독하는 사람들 역시 방송 조직위원이 무작위로 선발한 스무살 안팎의 여자들이다. 조직위원들이 카포를 선발하는 기준은 극히 단순했다. 보통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심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들마저도 별로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시 말해 저급한 윤리의식을 가진데다 개념이 별로 없는 어린 여자들이었다.

 

방송 '집단 수용소'는 전례없는 잔혹한 실상과 불쌍한 포로들의 모습을 24시간 실시간 중계를 했다. 시청자들은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행위가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그 경악스러움 덕분에 시청률은 계속 상승했다. 카포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포로들을 사정없이 채찍질하고 욕설하고 짓밟았고, 시청자들은 그런 카포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이 분노와 증오 역시 시청률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감정이었다. 시청자들은 포로들에게는 숭고한 동정을, 카포들에게는 혐오를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포로들은 더욱 죽음으로 하루하루 다가갔으며 카포들 역시 월급으로 그들의 포악성과 잔인성을 점점 더 업그레이드 했다.

 

양 진영에는 스타급 존재들이 하나씩 있었다. 포로 진영에는 CKZ114라는 번호로 통용되는 아름답고 지적인 포로 파노니크가, 카포 진영에는 즈데나 카포라고 명명되는 무식하고 포악함의 대명사인 그녀가 있었다. 즈데나 카포는 CKZ114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느낀다. 내부가 텅 비어 있는 자신과 비교했을 때 그 포로는 뭔가 내부가 차 있는 기분이었다. 일단 외모부터 즈데나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지만, 예쁜데다가 묵묵히 노동의 고통과 채찍질의 고통을 감내하는 파노니크의 모습에 즈데나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파노니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즈데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잘 것 없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그토록 매료시키는, 집단수용소가 아니라면 자신과 상종도 하지 않았을 인간 부류인 고귀한 여성 파노니크와 좀 더 긴밀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즈데나는 카포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CKZ114의 이름을 강제적으로 알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어느 정도 오픈한다는 의미. 파노니크는 상종할 가치도 없는 하급 인간에게 함부로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난 채찍질을 감당해야 하더라도 파노니크에게 그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에 당황한 즈데나는 더욱 폭력적인 방법을 쓰려다가, 그건 별로 현명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으로 회유책을 쓰기로 한다. 늘 먹을 것에 허덕이는 포로라는 파노니크의 위치를 이용해, 초콜릿을 쥐어준 것이다. 초콜릿 따위로 이름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파노니크는 동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한다. 먹을 것이 없어 마르거나 쓰러지는 건 곧 처형되는 운명인 상황에서 초콜릿은 목숨 연장 장치였다. 하지만 파노니크가 몇 번 씩이나 자신의 초콜릿을 받아먹고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자 즈데나는 다른 작전을 취한다. 그녀와 각별히 친해보이는 포로 하나를 처형자 목록에 올린 것이다. 그러자 숭고한 파노니크는 자신의 이름을 맞바꾸고 당당히 동료를 구해낸다.

 

즈데나의 비뚤어진 총애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급부상한 파노니크였지만, 사람들의 이기심 속에서 그녀는 점점 비곗덩어리의 비운의 여주인공이 된다. 동료들은 파노니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사랑하는 즈데나에게 몸을 팔고 우리 전부를 구해줘. 한 때는 동료들에게 영웅이자 신의 위치로 부상하였던 그녀는 집단수용소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황산은, 스토리 설정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그만큼 설득력이 없어서 읽다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중요한 건 상황의 실현가능성 여부가 아니다. 말도 안되는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들이 보여줄 수 있는 이기심이 어디까지인지, 사람에게 매료된다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을 수 있는지를 생각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악을 싫어하지만 분명 악에 매료되는 것,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스릴에 매료되는 것, 이 모순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작가는 현실에서도 모순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황산이 발표되고 나서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실패작이니, 최악이니, 제발 1년에 한 번씩 발표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딴건 그만 쓰라느니 하는 혹평이 쏟아져나왔지만 그런 스캔들 덕분에 작품이 더 주목을 받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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