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하더라도 천안에서 인천까지 왕래 할 일이 있을 때에는 특별한 대중 교통 수단이라고는 없이 오직 버스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조금 좋아지다보니 수도권 만의 명물이라 생각했던 거미줄 같은 전철 노선이 자꾸 자꾸 내려가 충청남도 까지 점령했고, 이와 함께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전철을 탈 것이냐, 버스를 탈 것이냐. 하긴 이 전에도 다른 교통 수단이 있기는 했다. 천안에서 서울까지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고 올라와 인천까지 전철로 오는 방법. 하지만 왠지 두 가지 이상의 교통 수단을 사용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번거롭다는 기분이 들어, 이 방법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생각을 조금 바꿀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처음으로 충청도 지역까지 전철이 뚫려 신기해하던 참에, 시간도 좀 남고 하니 모험도 할 겸 전철로 충청도에서 인천까지 여행을 해볼까 하는 의욕이 쓸데없이 일었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천안역(그때는 거기가 천안선의 종착지였다)에 가서 기차 타는 곳과 전철 타는 곳을 한참 헷갈려하다 겨우 전철 타는 곳으로 가 텅 빈 객차에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앉았다. 앞으로 상당한 시간, 적어도 구로까지는 이걸 타고 가야 할텐데 마침 종점에서 타기 시작했으니 자리 없어 다리 아플 일은 없겠구나 싶어 괜한 승리감까지 만끽하며 출발했는데, 겨우 수원까지 왔을 무렵에는 다리보다 허리가 아파서 그만 일어나고 말았다. 딱딱한 전철 의자에서 장시간 앉아 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인내심과 강건한 육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직 전철로 천안에서 인천까지 이동한 시간은, 중간에 노닥거린 시간을 대략 합하여 세 시간이었다.
그 무렵에는 천안에서 인천까지 왕복해야 할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 했다. 버스는 시간을 잘못 맞추면 교통대란으로 세 시간이 걸리고, 전철은 시간을 잘 못 맞출 일은 없지만 세 시간이 걸렸다. 그랬으니 서울까지 일단 기차를 타고, 다시 인천까지 전철을 타 보는 경우의 수를 굳이 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걸린 시간은 아마 두 시간 반 남짓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시간 이상 걸려 버리니 그거나 그거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도 천안과 인천은 대중교통 이용시 넉넉잡고 세 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 또 그 지역에 왕래할 일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사실 늘 이용하던 사람이라면 딱히 대단한 혜택이랄 것도 없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바로 KTX를 이용해서 다녀오는 것. 자주 타봤더라면 볼라도 일전에 딱 한 번 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자로서는 이것 역시 하나의 모험이었다. 광명에서 천안까지 20분이 걸린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곧장 들은 생각은, 과거 내 모든 경험을 총동원해 본 결과, 당연히 말도 안돼, 였다. 그렇지만 막상 발권했을 때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 사이에는 21분이라는 갭 밖에 없었다.
시간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분명 예전 한 번 타봤는데에도 기억이 잘 안나서 검표하는 사람이나 기계가 없는 것도 어색하게 선진화 된 느낌이었고,(고객신뢰선 아래에는 We Trust you가 괜히 민망했다) 다른 기차 역들과 차별화되어 높고 큰데다 건물 전면이 유리와 철구조물로 촘촘하게 메워있어 인천공항 같은 게 마치 해리포터가 벽 속으로 뛰어들어간 기차역이 조금만 모던했다면 이런 느낌일 듯 했다.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볼 때에는 나의 동체 시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평소 탈 것의 속도감을 측정하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구조물이 스쳐지나가는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었고 그 최측근 구조물은 당연히 전봇대나 그와 비슷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광명에서 천안아산역까지 21분이라는 말도 안되는 시간으로 미끄러지는 이 탈 것은 전봇대나 사각철탑, 방음벽에 눈길 꽂힐 틈을 허락하지 않고 사정없이 내달렸다. 방음벽의 무늬를 관찰하려다가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걸 느끼고 포기한 다음 조금 멀리 시선을 주어 푸른 논밭을 보다가, 그것도 이내 지겨워져 살짝 졸려고 하는데 곧 도착한다는 방송으로 짧은 여정을 놀랍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해서 천안에서 인천까지 오는 시간은 대폭 한 시간 반으로 줄어들었다. KTX 효과의 어마어마함이란. 광명역에서 구로역까지 운행되는 전철이 조금만 더 자주 있게 되면 이 시간마저 줄어들 여지가 있다. 선진문명의 위대함을 찬탄하기에 앞서 현실적인 문제를 굳이 따지고 들자면 요금은 순전히 전철만 이용하는 것보다 대략 다섯 배는 더 비싸진다. 기차나 버스는 음, 조금 쌀 지도 모르겠지만 비슷비슷한 듯 하다. 갈아타는 수고를 하고싶지 않거나 느긋한 여행의 여유를 즐기고 싶거나 휴게소에 들러 맛있는 걸 먹는 재미를 원한다면 역시 버스이지만, 휴게소에 들러 여행하는 거리인지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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