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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랜드를 다 보고 나온 시간은 대충 8시 10분 정도였다. 네비게이션으로 숙소 바로안내를 누르니 대략 30분 전후면 도착할 듯 싶게 나왔다. 펜션은 중문에 있었고 러브랜드는 공항에서 도깨비 도로로 올라가는 중간즘에 있었으니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도로 두개를 타거나 좀 빙 돌아서 완만한 경사의 도로로 가는 방법이 두가지 있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은 분명 전체 코스를 보여줄 때는 완만한 경사의 도로로 돌아가는 코스를 안내하겠다고 했는데 실제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중턱을 가로 질러야 가능한 키로수와 시간을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이렇게 생각했다. 중턱을 가로지르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험하니까 차라리 조금 빙 돌아가는 길의 키로수와 시간이 더 적게 나오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만약 내 예상이 맞았고 네비게이션이 처음 알려준 대로 가려면 우리는 좌회전을 몇 번 해서 방향을 타야 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은 계속 우회전 하라고 일러주었다. 네비게이션의 말을 듣지않고 내 직감만 믿었다가 고생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느낌은 좀 이상해도 기계가 더 정확할 거란 생각으로 안내하는 길로 운전을 했다. 그런데 점점 이상했다. 산을 가로지러 남쪽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아니라 섬의 북쪽, 산의 중턱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섬의 북쪽 중 서쪽에 있었던 원 위치에서 섬 동쪽 중턱으로 곡예운전하듯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점점 차량은 드물어지고 반원을 넘는 커브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돌고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도로들이 이어졌다. 이상한 기분을 넘어서 무서운 기분이 들고 있었다. 산을 오르고 있었다면 내리막길이 분명 있어야 서귀포시가 있는 남쪽으로 내다을텐데 우리는 계속 오르기만 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네비게이션에 찍힌 남은 키로수와 시간은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달았다는 것만 표시하고 있었다. 한번 믿은 거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여전히 오르막길만이 앞으로 보이고 오십 미터 전방에 하나 겨우 보이는 희미하고 노란 나트륨 불빛이 보이는 곳에서 네비게이션은 좌회전을 하라고 하더니 이내 막다른 도로가 나왔다. 도로 양 가로는 수풀이 검게 머리를 헤친것처럼 무성하고 가로등 하나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 오직 모닝에서 나오는 약한 상향등에 의지해서 주변 사물들을 파악해야 했다. 조금 앞으로 더 가니 도로는 끊겨있었고 앞에는 철 문이 가로막고 있어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맙소사.
차에 타고 있던 우리 넷은 당황하여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축소해 우리가 제주도 전체적으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재빨리 파악했다. 이번에 내 느낌은 맞았다. 계속 동쪽 오르막으로 치닫고 있었느니 우리는 한라산 동쪽 중턱즈음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숙소와 차라리 정 반대방향으로 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은 아닐 것이지만 정말 그랬다. 이건 정 반대로 가는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이 어두운 산 중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기왕 이렇게 밤에 산길을 타게 될 거였다면 도깨비 도로가 있는 서쪽 1139번 도로로 타고 올라갔으면 차라리 가깝기라도 했을텐데, 이건 산을 반대쪽으로 반바퀴 빙 둘러 험한 길을 운전해 내려가던지, 아니면 다시 제주시로 내려가 해안도로 같은 완만하고 안전한 길을 따라 섬 전체를 반바퀴 빙 둘러 내려가던지 해야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게 모든 선택권이 주어진 동시에 모든 두려움도 내게 씌워졌다. 함께 타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은 내가 느끼는 공황과 두려움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예전에 들었던 죽음의 네비게이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자꾸 도로가 끊겨있는 한 지점으로 들어와 바다에 빠져 죽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 알고보니 지나치게 업데이트 되어있던 네비게이션이 아직 공사 준공도 되지 않은 도로 정보를 알려주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것만 믿고 달려들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기가 한라산 중턱만 아니었다면 도로도 끊겨있고 딱 죽음의 네비게이션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공포적 상황을 나처럼 실감하고 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낙천적인건지 그냥 운전만 하고 가다보면 언젠가 펜션에 도착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나는 운전대를 내팽겨치고 싶었다. 어쨌거나 나는 두려움을 감추고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어느 코스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 머리속으로 계산을 하고 네비게이션에 입력시켰다. 기계가 두번 실수하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믿을 수 없어서 지도를 보고 내가 따라 내려가야할 도로 1131이란 번호를 확실히 외워두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이미 중턱까지 올라온 이 도로를 끝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 그러니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온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었다. 올라온 길이 험했으므로 앞으로 펼쳐질 길도 험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올라갈수록 예상보다 더 심하고 험한 길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이 커브만 돌면 내리막길이 이어지겠지 하고 낙관하고 싶은 순간에는 여지없이 더욱 험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야생동물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희뿌옇게 보였다. 설마 길이 백록담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 하는 게 유일하게 낙관할 수 있는 길이었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길이 한 층 더 구불구불해져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180도를 넘어 300도를 넘는 커브길을 돌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다 밤길이 보이지 않아 조심운전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차량이 나타나 업라이트를 켜고 깜빡깜빡 거릴때는 짜증이 치밀었다. 추월해서 빨리 갈 것이지 왜 저렇게 라이트를 켜고 난리란 말이야. 그게 나 역시 상향등을 끄라는 메시지인줄 모르고 초행 한라산 내리막길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산을 다 내려왔을 때는 한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그렇게 상향등을 계속 키고 내려오면 어쩌느냐고 한 소리를 들어야했다. 나는 싸움에 약한데다가 이미 거기서 한마디 대꾸해 줄 기력도 완전히 소진하고 있었으므로 알았다고 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업라이트를 끄지 않은 건 내 잘못이긴 했으니까.
그런 죽음의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고작 9시 30분이었다. 엄청나게 임팩트하고 컴팩트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긴장된 신경을 달래기 위해 어제 마시다 남은 맥주들을 전부 꺼내 마셨다. 우리는 개그콘서트를 보며 마치 집에서 일요일을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급속도로 골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