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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 해안은, 굉장한 곳이었다.
일단 해안의 모래가 시꺼먼 것부터 인상적이었다. 모래 속에 현무암 알갱이들이 거칠게 섞여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특이하긴 했다. 입자가 곱지 않아 여름에 해수욕을 하고 나오면 발이 아프기도 할 것이고 새까매질 거라고 생각했다. 계절을 불문하고 바닷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가만 바라보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제주도 남쪽을 바라보면서 각자의 세계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바다 건너편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섬이 육지에서 튀어나온 부분일지 섬일지, 만약 섬이라면 그냥 인근 섬인지 마라도 인지를 상상해보았고 그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키나와가 나오겠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만이 나오려나. 대만도 한 번 가봐야 하는데, 하는 두서없는 공상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 머릿속에는 어떤 사고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물론 모른다.
해변 왼쪽으로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있었는데 패스츄리같이 층층겹겹으로 이루어진 높은 돌덩어리였다. 이런 식으로 지형이 형성되려면 어떤 지질 작용이 필요한지에 대한 지식을 알아본다는 게, 흥미가 없어서 지금껏 깜빡하고 있는데, 얼핏 듣기로는 용암에서 분출된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식는 정도에 따라 모양이 결정된다고 한 것 같다. 용머리 해안이 보여준 모양이 어느 정도로 식어야 형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건 잘 모르겠지만.
남색 교복을 입고 단체로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의 무리를 헤치고 그 바위의 결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파도가 돌덩이 옆을 열심히 때리고 있었는데 바닷물이 만나는 수위에는 어김없이 따개비와 홍합이 징그러울 정도로 자잘자잘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홍합은 아직 애기라서 딴다 해도 알맹이는 눈곱 정도나 될 듯했다. 바다 새가 그 사이에 내려 앉아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우성인 걸 보면 생명의 본질은 따개비나 나나 다를 게 없었다.
엄청나게 큰 바위산의 동일한 능선을 둘러 걷는 기분으로 걸었는데 바깥 쪽으로 크게 돌다가 안쪽으로 들어간 지점에는 이 근처에 살 거라 추측되는 아주머니들이 소주에 전복, 해삼 등을 팔고 있었다. 소주는 혜진이가 그저께 혼자 한 병을 다 마신 제주도 소주 한라산 물이었고 커다랗고 빨간 고무 다라에 들어있는 해산물들은 싱싱해보였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이런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기꺼이 그들의 고객이 되겠다고 하면 즉석에서 판이 만들어졌는데, 식탁은 물론 없고 동네 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가 사람의 수대로 늘어진 다음 돌바닥에 막 썰은 해산물과 소주잔들이 놓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먹는 사람들의 여유가 운치있어 보였기 때문에 회를 즐기지 않는 내 취향이 조금 아쉬울 정도였다.
패스츄리 바위는 생각보다 굉장히 커서 에노시마 섬을 한 바퀴 돌았던 때가 생각났다. 에노시마처럼 험하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을만큼의 길은 보장되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었을 다리들도 꽤 보였는데 오히려 이 점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한 바퀴 돌 수 없을 만큼 바위 사이 폭이 넓은 곳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렇지 않다면 걷다가 곧장 바위 사이 바닷물 위로 수직 다이빙을 하게 될 거였다.
용머리 해안 탐험을 마치고 산방산을 뒤로 한채 우리는 천천히 제주시로 올라가기로 했다. 시간이 아직 꽤 남았지만 차에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날 죽음의 네비게이션의 장난에 지나치게 놀아난 결과였다. 맨 처음에 기름을 넣으면서 렌트카 반납할 때 남을지도 모를거라는 걱정은 기우가 되어버렸고 나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주유램프에 불이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차를 몰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락 하며 휘발유를 소진하는 것보다 널찍하게 서쪽 해안을 따라 움직이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편이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중간에 유채꽃밭에 들러 사진을 찍으며 제주도 여행의 향연을 마무리하고 이제 정말 제주시로 출발했다. 애초 계획은 4시에 렌트카 반납이었으니 제주시에 도착하면 시간이 충분히 남을 것 같았고 우리는 오늘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했으므로 시내 어디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를 하며 여유롭게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12키로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벌써 주유램프에 불이 들어와버렸다. 나는 더 이상 운전을 하기 힘들었고 시내로 들어가봤자 주차할 곳을 찾느라 시간과 기름을 버릴 것이 훤히 보였다. 이런 이유로 렌트카를 반납한 시간은 2시가 되어버렸고 우리가 제주도에서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곳은 제주공항 국내선 2층 식당이었다. 음식은 아주 맛있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냥 뭐, 먹을만 했다. 우리는 각자 여행의 즐거움과 신체적 고단함이 뒤범벅이 된채 말할 기운도 없이 밥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