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갈택이어 竭澤而漁

gowooni1 2011. 7. 30. 00:02

 

 

 

 

비 오는 날이 좋긴 하지만 폭우는 예외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입고 나가야 할 지 한참 고민을 해야 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난데, 치마를 입자니 활동 반경에 제약이 따를 것 같고 그렇다고 바지를 입자니 아랫단이 흠뻑 젖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얼마 전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아침 청바지를 두 단 걷어 입고 현관에 서서 무엇을 신을 지 고민을 하다가 한동안 신지 않던 여름 샌들에 눈이 갔다. 발가락이 조금 보일만큼만 앞이 파인 그 여름 구두는 에나멜 재질이고 가장자리는 하얀색 합성 피혁으로 가늘게 둘러싸인, 그냥 평범한 샌들이다. 아무렇게나 신고 다니기에 딱인, 그런 부담없는 신발이었는데 올 여름 들어 좀처럼 그 신발에 눈이 가지 않았다. 가끔 신을 때마다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고 말아서 잘 안 신었는데 폭우의 아침은 흠뻑 젖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신발이 필요했다. 그 구두가 적격이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종종 구두를 닦는 아저씨가 찾아온다. 아저씨는 사무실을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구두를 수거해 장바구니 비슷한 것에 담아 간 다음, 몇 시간이 지나 다 닦은 구두를 들고 와 직접 돌려주며 장사를 한다. 아저씨의 구두 닦는 작업 장소가 어딘지 궁금했었는데 길 가다가 그가 오토바이 뒤에 수거한 구두를 잔뜩 싣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근처에 작업하는 곳이 따로 있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언제나 뙤약볕 아래서 막 일을 하다 온 것처럼 피부가 불그스름 했고, 인생이 별로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 깊은 주름과 늘 져 있는 미간 인상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갖고 있었다. 자신에게 자주 구두를 맡기는 사람 앞에서는 꼬박 꼬박 선생님이라 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갑이 아닌 을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정도 만큼의 굽신거림이었다.

 

작년 내가 이 사무실에 오게 되었을 때 역시 여름이어서 앞이 트인 샌들 몇 개를 돌아가며 신고 출근을 했다. 그 중에는 물론 아까의 검은 에나멜 구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두가 하도 많이 낡고 굽도 많이 닳아서 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면서도 물건에 미련이 많아 결정을 딱 내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몇 번의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 굽을 한 번만 더 갈아 신고 그 굽이 닳으면 미련없이 버려야겠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아침, 그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하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울리는 쇳덩어리 소리에 오늘은 꼭 굽을 갈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구두 닦는 아저씨가 사무실에 들른 것이었다. 나로서는 굳이 쇠가 드러날 정도로 다 닳은 신발을 신고 굽 가는 곳을 찾아갈 수고가 덜어질 참이었으니 잘 되었다 싶어서, 아저씨에게 뒷 굽을 갈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구두의 상태를 보더니 앞창이 다 닳아서 미끄러울테니 안되겠다고 말했다. 아저씨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의사 표현을 제대로 안하면 앞창 붙이라고 설득당할까봐, 나는 웃으며 이 구두를 오래 신을 생각은 없으니 꼭 뒷굽만 갈아다 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몇 시간 지난 후 아저씨는 자신이 수거한 구두를 돈과 함께 맞바꾸러 다시 사무실에 들렀다. 이 아저씨가 내 앞에 섰을 때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느낌이 아차, 싶었다. 다른 남자직원의 구두를 들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받아야 할 돈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순종적인 영업적 미소를 띄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게는 전투적인 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살핀 다음 거의 본능적으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구두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그는 밑창까지 갈아왔던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이 구두는 앞으로도 몇 년은 신을 수 있으니 밑창을 덧댔어야 했다, 요즘은 비가 많이 오니 이 밑창이 더욱 필요하다, 이 밑창은 특허를 받은 거라서 다른 제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끄럼방지는 물론이고 푹신하기까지 하다, 등등 별의별 자기합리화의 근거를 찾아다 댔다. 하지만 그 구두 겉을 싸고 있는 하얀 합성피혁은 거의 다 벗겨져서 너덜거렸고 에나멜 역시 코팅된 부분들이 까져서 보기 흉했다. 누가봐도 갖다 버려도 신통치 않을 구두에 밑창을 억지로 대놓고는 한술 더 떠서, 원래는 이게 비싸고 좋은 밑창이라 만 삼천원은 받아야 하는데 나한테는 특별히 만원에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에게 만만하게 보인 것이었다.

 

아마 그는 내가 이 사무실에 잠깐 머물다 가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남자 직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무실에서 제일 구석 책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젊은 여직원이니, 계속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있을 때 자기 실속이나 챙겨야지 하는 심정이었겠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앞으로 얼굴 안 볼 사람이라면 갈취할 수 있을 때 갈취하는 것이 이득일테니까. 그의 상업윤리는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생각한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선사해야겠다는 법칙보다 먼저 자신의 득실만을 따져보는 법칙이 우세했다. 그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올 돈보다 자신의 손길이 닿았던 구두를 신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이후로도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있고 그는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러 외면하는 그를 보면 조금 안쓰러운 기분도 든다. 만약 그때 그가 한 순간의 이익에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껏 처음 그에게 지불했던 돈의 세 배는 훨씬 넘을만큼 굽을 갈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 이상은 갈아줄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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