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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드디어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난 멍한 상태로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이불을 개키고 물을 마시고 짐을 챙겼다. 오늘은 4시에 공항에 렌트카를 반납하기로 했다. 너무 일정에 쫓기지 않고 볼 수 있는 것만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은혜가 용머리 해안이 좋다고 가자고 했는데 지도를 들여다보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있었다.
작은 사건이 또 하나 발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멍한 기운으로 오늘 또 운전을 해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겨우 힘을 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혜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 밤에 자기가 운전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피로해서 기진맥진해 있는 나는 괜히, 내 속도 모르고 운전하고픈 자기 마음에 충실한 그애에게 서운했다. 열심히 운전하고 가이드북까지 사와 코스도 짜던 내 옆에서 그 애는 운전대를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인정한다. 나는 소인배적인 자아에 휘둘리고 있었다.
팬션에서 짐을 모두 싸와 출발을 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10분도 안 될 정도로 가까웠다. 산방산이라는 엄청나게 큰 바위덩어리 산 아래 용머리해안 진입로라는 팻말이 보였다. 산 바로 아래 휴게소에 잠시 주차하여 커피를 사 마시고 있는데 그 애는 결국 자신이 300미터만 운전을 해보겠다 했다. 300미터는 어제부로 우리에게 신뢰를 잃은 네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뜻하는 것이었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처음 운전에 재미를 붙인 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한 번 해보라고 키를 건넸다. 혜진이는 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한테 운전 연습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나는 뒷좌석에 타고 그 애가 운전대를 잡았다. 처음부터 불안하기 시작했다. 도로로 진입하지 않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문제는 그 애가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 곳이 도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전을 하느라 네비게이션 안내를 볼 여력이 없는 그 애를 대신해서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더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섰고 나는 차를 돌려 왔던 길을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애는 갑자기 후진 기어를 넣고 뒤로 차를 운전하려고 했다. 도로 한가운데서. 만약 그 도로에 차가 없었더라면 문제는 되지 않았을 테지만 내가 뒤를 쳐다보았을 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태운 관광버스 두대가 이제 막 커브를 돌아 우리차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 버스와 모닝이 부딪힌다면 꼼짝없이 저세상으로 가는 건 우리 네명, 그것도 뒤에 앉아 있는 나와 은혜가 먼저 가겠구나,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를 무사히 추월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차선에 차가 지금 하나도 오지 말아야 그럴 수 있을텐데. 등등.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건 정말 나의 무의식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괴성이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지를 수 있을 거라고는 나조차 몰랐으니까. 어쨌거나 괴성은 다행히 효과를 발휘하여 혜진이의 후진을 멈추게 할 수 있었고, 다행히 반대차선에 오던 차는 버스가 추월해도 괜찮을 만큼은 떨어져 있었고,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추월해 통과해갔다. 식은땀이 다 났다.
나는 곧장 차를 세우고 혜진이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도로 이쪽 저쪽에서 차들이 멈추고 우리가 운전자를 바꾸어 출발시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손을 들어 양쪽에 양해를 구한다음 운전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고 나니 헤진이한테 너무 큰 소리를 지른게 미안해져서,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가 소리를 지른게 누구를 섭섭하게 하기 위한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혜진이는 주눅이 들었어도 아무말 하지 않았으며 그 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나의 사과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용머리 해안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감귤, 한라봉, 백년초 초콜릿을 사고 닭꼬치를 먹으며 하멜 전시관까지 걸어가는 중에야 우리는 겨우 긴장을 풀고 다시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