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철학*문사철100

목민심서-다산 정약용 리더십

gowooni1 2011. 6. 18. 18:43

 

 

 

 

다산 정약용의 호는, 그 자신이 붙인 게 아니고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茶山에 오래 거주하였기 때문에 저절로 붙여졌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난 그가 전라남조 강진까지 가게 된 사연은 신유박해 후 유배라는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사건의 결과였다. 22세에 진사시를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가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조정의 신하가 되고, 28세에는 장원 급제하여 금의환양하는 탄탄대로를 달리던 정약용이었다. 그가 시대적 상황 하에서 저지른 죄라고는 아직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던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는 것인데, 비교적 열린 사고를 가진 정조 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일이 세도정치의 시작인 순조때부터는 피의 박해를 부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정조의 충신이었던 정약용이었으니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친 조정의 소인배들 사이에서 그는 공공의 적이었을 터이고, 늘 그를 든든하게 감싸주던 정조가 젊은 나이에 서거한 상태에서 졸지에 소인배들의 밥으로 전락했다. 철저하게 탄압되기 시작한 천주교는 정약용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으나 그간의 업적이 감안되어 간신히 사형은 면하고 유배길에 오른 그는 처음에는 경상도 한 지방에 유배,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다시 조사를 받으러 조정에 불렸는데, 여기서도 정약용을 죽일 만한 건수를 잡지 못한 소인배들은 그가 다시는 서울에 얼씬도 못하게 땅끝으로 18년이나 유배를 보내버렸고 그게 바로 지금도 인구 오만이 채 되지 않는 깡촌 시골마을 전라도 강진이었다.

 

엄청나게 먼 유배길을 오르면서 정약용은 세상을 미워하고 인생 무상하다며 자포자기에 빠져 지냈을 법도 하지만 진정한 성인이었던지 아니면 다른 외부적인 것들에 부정적 에너지를 쏟기엔 인생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현명하고도 이기적인 생각에서 그랬는지 18년이라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일 없이 지냈다. 그가 저술한 600여권의 책 중 대부분이 이 강진 시절에서 생산되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강진으로 떨어진 과거 높은 분을 귀하고 불쌍하게 여긴 한 주모가 자신의 주막 뒤편에 있는 초가 삼간을 내어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여기는 일시적으로 다산의 거처가 되었다. 이 조그만 집칸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짓고 네가지-생각, 용모, 행동, 말씨를 바르게 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간으로 삼았다. 생각을 바르게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고, 행동을 옳게 하고 말씨를 온화하게 하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의 근본이라는 것을 항상 유념해 두려던 다산의 자기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어린 나이에 조정에 나와 십여 년 넘게 높은 벼슬자리를 두루 거치며 지내던 그였으니 이미 지도자로서의 크고 깊은 그릇은 완성되었을 터인데 그것을 더 이상 써먹을 길이 없어진 유배 당시 정약용의 나이가 이제 겨우 40세 였다. 하지만 그는 이 시간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잔뜩 읽고 쓰고 싶었던 글을 쓰는 시간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몇 번 거처를 옮기다가 다산이라는 산의 중턱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에 들어가 유배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며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1800년 순조 즉위 후 60년 간 이어진 세도 정치는 정조 즉위로 25년간 간신히 누릴 수 있던 르네쌍스 시기를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관직을 과거로 얻으려는 사람은 멍청이였고 모든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월이 도래했다. 엄청난 자본을 들여 관직을 얻은 사람은 그 역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감가상각을 하고자 고군분투 하였고 그 결과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없다는 것이 죄가 되어버린 일반 백성들의 등골만 휘게 되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와 죽은 지 오래 된 사람들도 군포를 내야 했고 자식을 나은 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세상에서 분노에 찬 남자는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도려내는 사태가 발생하던 게 조선 말기의 초상이었다(애절양). 다산이 머물고 있던 깡촌 강진에서조차 그런 실정이었으니 조선 전체적인 모습이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다는 것은 직접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목민심서를 작성한 것은 목민관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을 관리들에게 널리 유포시키고자 한 것이었지만, 실은 심서心書라는 단어에는 다산의 슬픈 의도도 담겨 있었다. 유배온 처지에서 직접 칼을 들고 싸울 수 없으니 마음이라도 달랠 요량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수령의 의무를 생각했던 것이다.

 

목민관은 그 당시 고을 수령 급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오늘날로 보자면 시장이나 군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인구수와 지금 인구수를 따지자면 그 당시 수령이 다스려야 할 인구수와 지금 높은 사람이 다스려야 할 인구수의 차이를 감안해서 꼭 그 지위에 있는 사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해당사항이 있다고 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목민심서는 총 12권으로 되어 있고 각각 6개의 조항들이 담겨져 있는데 1,2,3,4,12권 이렇게 다섯개는 대략 목민관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책이고 나머지는 실무적인 것에 대한 행동책이다. 물론 지금은 조선시대와 상황이 달라져서 실무적인 것들에 대한 적용이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나라를 다스리고 발전시키는 것의 근본은 여전히 비슷하므로 통한다.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인구수를 늘리고, 산림 자원을 늘리고, 병력을 증강시키고, 도로를 닦고, 건축물을 짓는 것은 고대 로마 때부터 지금껏 늘 중차대한 국책사업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백프로 통해서 그가 생각한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읽고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며 하루 하루 급급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는 자세가 사람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어째서 그리 중요한지 숙고하게 된다. 그가 공직자였으니 물론 공직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특히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청렴) 그건 오늘날 기업인들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윤리이기도 하다. 가장 와닿는 것은 퇴임에 대한 그의 생각인데, 언제든지 깨끗하고 가볍게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되 사랑을 남겨야 한다는 유애遺愛정신은 모든 것은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말 이상으로 여운이 남는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