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철학*문사철100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gowooni1 2011. 1. 9. 17:17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의다, 라고 말할 수 있음은 곧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음을 뜻한다.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정의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고대에는 절대적으로 옳았던 기준도 현대 사회에선 절대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이다. 전쟁으로 땅따먹기 게임을 하던 옛날에는 눈 깜짝 안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용기있고 남자다운 기상을 나타낸다며 대중의 찬사를 받았을테지만 요즘은 싸이코패스가 되어 절대악으로 매도된다.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취급받아 화형까지 당하던 중세와 달리 요즘 세상에 남의 종교를 비난하면 모두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결국 옳고 그름이란 상대적이다. 어느 시대에 어떤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느냐에 따라 정의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해왔던 모든 정의를 논하기는 힘들다. 일단 무엇이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느냐부터 문제가 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시대에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었던 정의라면 논할 가치는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라고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론의 헛점에도 불구하고 납득할만한 요소가 더 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세상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난 날 존재해왔던 정의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열성은 사라지고 우성만 유전되어 더 나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생물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의도 지난 날의 것들 중 나름대로 좋은 것들만 취해져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 시대 이전에 대다수 사람들이 정의라고 믿었던 이론을, 마이클 샌델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한다. 제레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 현 사회 대부분의 자본가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효력을 잃지 않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 먼저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대의 목표인만큼 벤담의 주장은 얼핏 보았을 때 정의로 보인다. 하지만 최대다수라는 말에서 우리는 인권이 자칫 무시되거나 상실될 수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최대다수가 있다면 극소수의 사람도 존재한다는 말인데, 최대다수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 극소수 사람들의 행복은 무시될 수 있다는 논리가 과연 옳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을때까지 행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지만 누가 그 죽는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심지어 내가 그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개인을 무시했다는 것에서 오류이고, 행복의 질을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첫번째 오류가 더 크다. 개인을 무시한 사회에서 절대적 행복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이를 보완한 주장을 내세운 것이 천재아로 자란 존 스튜어트 밀이다.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논한 그는, 개인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도내에서 최대한 자유로울 수 있고 정부도 그런 개인의 권리에 간섭할 수 없음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런 식의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모든 이들이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밀도 엄밀히 말하면 공리주의를 내세운 것이지만, 소수를 희생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벤담과 생각의 뿌리가 아예 달랐으므로 밀은 아버지 친구인 벤담을 배신한 꼴이 되었다. 물론 자신은 끝까지 벤담을 이은 공리주의를 주장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벤담이 생각하는 공리주의에서는 자유가 부족하다. 희생되는 극소수에게는 아예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고로 평등하지도 않다. 기본적인 평등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가 행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리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인 평등의 권리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권리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류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고 좋은 회사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고위직 시험에 응시하는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이고 자유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평등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또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기 바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기본적인 교육도 못받고 어릴때부터 먹고 사는 걱정을 해야 한다. 최고급 교육을 받은 아이가 일류 대학에 지원하는 것과 하루에 공부할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된 아이가 같은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인지 생각해보면 자유지상주의의 오류가 대충 보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논한 자유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내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 의미가 더 가깝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인가?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좀 달랐다. 칸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가 진정한 자유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콜라를 먹고 싶으면 내 돈을 주고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얼핏 보았을 때 이것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인 것 같다. 하지만 칸트는 '콜라를 먹고 싶다는 몸의 욕구'에 굴복한 것이므로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진정한 자유란 도덕, 선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기준을 세워 '콜라는 몸에 좋지 않으므로 앞으로 먹고 싶어도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에 따르는 일이 진정한 자유이다. 몸의 욕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세운 기준을 따르는 것. 그것이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이다. 그러니까 칸트를 따르려면 절대적인 선, 도덕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럼 이제 도덕이다. 선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옛날부터 정치의 기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선이라는 개념부터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필요없는 물건을 친구에게 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도 좋은 일이다. 나도 좋고 친구도 좋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은 이유'는 그것이 베풂을 행사한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도 아니고 좋은 물건을 얻어 이로워진 친구 때문도 아니다. 오직 그 물건이 본질적 목적을 행사할 수 있는 옳은 곳을 찾아갔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선이고 덕이라고 그는 말한다. 모든 사람이나 물건이나 이념에는 그 자체만으로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옳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정치도 그는 '정치가 시민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고 폴리스의 의미를 확고히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해야 하고 그래야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살던 시대의 시민이란 여자와 외국인이 배제된 사람들을 뜻하긴 했지만, 이런 전제는 제외하고 오늘날에 적용해보면 공동선의 의미를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집단을 존중하는 법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데, 이 법은 자칫하면 역차별의 논의로 번지기 쉽다. 교사를 뽑는 시험에서 한쪽 성이 지나치게 많으면 다른 쪽 성을 일정기준 이상 뽑겠다는 양성평등법은, 다수 성 사람들 중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역차별 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역차별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성에 상관없이 성적에 따라 능력에 따라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 이유도 있다. 소수를 일정정도 보호함으로서 차후에 생길 보이지 않는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불화를 막는 거시적 관점을 유지해야 할 필요도 있다. 아이들이 여자 선생님들에게만 교육을 받아 생길 여성적 사고방식에서 남성적 사고방식도 접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유도 있다. 향후 발생할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해서 사회 전체적인 선을 높이는 것. 이것이 정의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쉽다. 한 가정에 가족 구성원 네 명이 살고 있다. 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고 자유지상주의도 추구한다. 각자 자신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버는 자신의 목표에 집중을 하고, 어머니는 많은 사랑을 나누는 데서 행복을 느끼고, 아이들은 마약과 술을 하며 행복을 추구한다. 각자 행복했고 자유롭게 살았으니 옳은게 아닌가? 물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 행복도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합의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행복이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 거시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 회사만 잘 되고 남은 망하는 것이나, 우리 나라만 잘 살고 옆 나라는 굶어죽는 것이나 사회 전체적 행복과 선을 높인다고 볼 수 없다.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느끼고 모든 사람이 함께 옳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한 지성이라면 고려해보아야 할 고차적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