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사랑을 말해줘

gowooni1 2011. 6. 15. 00:14

 

 

 

 

공원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던 슌페이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교코를 처음 본다. 공원 관리인이 4시 반에 문을 닫으니 나가달라고 말을 했는데에도 여자는 꿈쩍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 너무 집중해서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그녀 앞으로 가서 문을 닫으니 그만 나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을 전해주지만, 자신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에 오히려 당황하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렇게 강렬한 눈으로 자신의 입을 쳐다본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눈빛은 슌페이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찾은 공원에서 교코를 만났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번째만큼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대화도 했다. 모든 것에 어색함이 없을만큼 그녀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갔다. 지금껏 만난 여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녀와는 대화가 입을 통해서가 아닌 종이와 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유난히 그녀의 세계에는 소리가 없었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 사는 교코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슌페이는 언어라는 것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의사소통을 너무도 쉽게 할 수 있게 만든 말이라는 것이 한 편으로는 불쾌한 감정마저도 너무 쉽게 전달시킬 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불평불만이 지금껏 사귀던 여자들과는 불화의 기초가 되었지만 교코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전달이 되지 않았고, 자신의 불만스러운 감정을 전달하고자 종이에 써내려가면 그 즉시 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이 유치한 자아표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먹고 마셔도 슌페이는 소리 없이 사는 교코에게 적응해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그녀는 못알아 들었고, 바로 등 뒤에서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져도 보지 못하는 이상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슌페이가 봤을때는 긴박하고 조바심나는 시간들이 교코에게는 여전히 아무 문제 없고 평온한 시간일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런 때일수록 슌페이는 교코와 함께 있어도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것 같은 그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질감을 느끼고 또 한면으로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마음이 불안하지 않도록 늘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슌페이는 결국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연애상황은 어느 정도 진척이 있지만 일에 있어 슌페이는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행중이었지만 여기저기 삐걱거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일에 불만이 있을때, 나 요즘 힘드니 내 처지를 헤아려 나의 불평을 좀 이해해달라는 투의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부었을 것이 교코에게는 좀처럼 통하지 않아서, 오히려 연애에 있어서는 좋은 결과를 나았다. 그러던 어느날 일에서도 조금씩 풀리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고, 슌페이는 거기에 점점 빠져든다. 세계문화유산을 테러한 조직의 우두머리 급을 인터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기회를 놓쳐법릴수는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교코와 하와이로 여름 휴가를 다녀오기로 약속을 한 때였다. 난생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기뻐하는 교코의 얼굴을 앞에 두고 도저히 휴가를 취소하겠다고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인터뷰를 준비하고 취재차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슌페이는 교코에게 점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졌다. 이틀간 철야를 하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빨리 나가야 하는데, 그런 자신을 마중해주겠다고 허둥지둥 쫓아나오는 교코가 오히려 짐스럽고 귀찮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코는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주지만 슌페이는 미소를 보내려는 교코의 얼굴을 등지고 쫓기듯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지하철을 타려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짐을 놔두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교코의 얼굴을 찾아보지만 이미 거기에는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없었다.

 

취재는 순조로웠고 일은 잘 풀렸다. 슌페이가 기획하고 있던 다큐멘터리는 소재의 질이 너무 좋아서 애초에 계획되었던 30분짜리 프로그램이 1시간짜리 황금시간대 방송으로 변경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5회짜리 시리즈 물로 변경되었다. 그만큼 슌페이의 회사 내 입지는 올라갔고, 그 말은 즉 일에 시간을 전부 쏟아부어야 함을 뜻했다. 30분짜리 방송을 5회 시리즈로 바꾸기 위한 작업이 계속되면서 슌페이는 귀국해서도 교코에게 연락할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다. 겨우 작업을 마치고 교코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에는 일주일을 넘게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그녀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에 있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문자와 메일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그제야 순페이는 자신이 교코의 집 위치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그녀와 만난 공원 근처에 산다고 말했던 것을 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가지고 슌페이는 이제 매일 그 동네를 뒤지며 교코의 집을 찾아헤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