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이 세상 수많은 미혼 남녀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수보다 더 많은 기혼남녀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한 번 하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한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결혼이 비교적 인생 초창기에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사실 아래 잠깐의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따르는 이유는 혼자 살기 싫어하는 사회적 습성 때문이라거나 타인과 다른 종족-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혀 인생살이 힘들어질까봐, 또는 그것이 이 사회라는 것을 존속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틀임을 모든 이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가보다.
장미 비파 레몬은 결혼한 남녀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다 겪는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했던 사람과 하루아침에 헤어지고 새로 만난 남자와 6개월도 되지 않아 결혼해 그저그런 행복한 아내로 살아가는 도우코, 사랑해서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어쩌다 한 번 남편이 집에 들어와야 얼굴을 보는 생활을 몇 년째 하고 있는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 레이코,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흘러흘러 결혼 생활을 11년째 한 꽃집 주인 에미코. 크게 이 세명의 여자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는 진행되고 그 다음 비중이 큰 건 레이코의 남편 츠지야와 그의 애인 에미, 그런 츠지야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여자 사쿠라코 정도이다.
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클로즈업 해 그려나간 장미 비파 레몬을 읽다보면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성실하지만도, 진지하지만도 않다는 씁쓸함이 입가에 맴돈다. 도우코는 결혼 생활에 만족해서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고 남편과 크게 문제가 있지도 않은데, 강아지를 산책시키다가 공원에서 만난 남자하고 만나 불같은 정사에 빠지며 말초적인 쾌락을 탐닉한다. 레이코는 몇 년째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과의 결혼에 불만스럽고 또 그에게 많은 애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뒤에서 질투나 하는 여자가 되는 게 두려워 애써 모른채 눈 감으며 삶이 원만한 척 연기를 한다. 에미코의 사정도 행복과 근접하다고 보기는 좀 어렵다. 11년 전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이미 사랑이 식어버렸고 두 번 남편 몰래 임신 중절 수술을 하며 끝까지 엄마란 종족이 되기를 거부한다. 츠지야는 남들 보기에 멋진 아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적 쾌락은 모델 애인 에미에게서 충족하고, 에미도 츠지야의 결혼생활을 방해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그의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겠다는 생각을 남몰래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생활에 대한 굳건한 신조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 다들 주변인들의 페이스와 자신의 순간적인 마음에 휘둘려 흘러간다.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기보다 감정에 솔직하고 현재의 느낌에 충실하다. 그 양상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인생에 대한 치밀한 계획과 가치관을 세우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이, 현재에 충실하고 남들의 도덕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악에 가깝다 하더라도 자신의 느낌을 중시하는 인생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인생 스케치 때문에 삶에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건 바보같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인생은 원래 이런 식으로 공허함으로 가득차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크게 낙심할 건 없다. 공허는 공허로 가득한 사람의 눈에만 크게 비추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눈에 비친 공허감 때문에 독자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이 작가의 공허감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독성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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