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의 산 마르코스 대학 법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인 마리오는 대가족 휘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열 여덟살 미성년자이다. 비록 매우 훌륭한 엘리트적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돈의 팔촌까지 친척이란 친척들은 모두 마리오가 나중에 커서 크게 한 건 할 인물로 보고 있다. 학교 성적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가진 문학적 재능 때문인데 그도 그럴 것이 마리오는 어릴 적부터 시 한 수를 휘갈겨 집안 어른들의 감성을 뒤흔들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마리오도 자신이 가진 문학적 재능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집안 어른들이 그가 커서 큰 인물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이 자신은 작가가 되어 글로 밥 벌어 먹고 살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일단 작가로 데뷔한 후에 파리로 건너가 다락방에서 소설가로서의 감수성과 경험을 쌓으며 착실하게 글쟁이의 길을 밟겠다는 미래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물론 이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에게 말하면 반대할 것이 뻔했으므로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마리오가 커서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 집안과 국가의 위상을 드높여 줄거라는 주변의 기대를 모른채 하고 정작 본인이 꿈을 위해 하고 있던 일은 페루의 라디오 방송국 판 아메리카나에서 뉴스 속보 기사나 작성하며 용돈 조금 버는 일이었다.
부모가 미국에 사는 관계로 조부모의 집에서 얹혀 사는 마리오는 일주일에 한번씩 루초 삼촌과 올가 아주머니의 집을 방문해 저녁을 먹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훌리아라는 여자가 그 정기적 방문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훌리아는 옆 나라 볼리비아에서 온 서른 두살의 여자로 올가 아주머니의 여동생이었다. 이제 막 이혼을 하고 삶에 새 공기를 불어넣을 겸 머리도 식히러 자기 언니의 집에 와 묶고 있던 그녀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한 것은 훌리아가 새로운 남편감을 찾기 위해 페루에 왔다는 거였다. 본인도 그것을 굳이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매일 저녁 다른 남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데이트를 하러 다니면서 새로운 남편감을 물색하는 생활을 정착해 가고 있었다. 훌리아는 마리오의 엄마와 예전에 각별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모처럼 만난 마리오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그 방식은 영락없이 예전 꼬마 마리오를 대하는 태도여서,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하고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그에게는 치명타를 날린 셈이었다. 처음에 훌리아를 만났을 때 마리오는 엄청난 불쾌감을 느꼈고 그녀에게 있어 어른 대접을 받아내야 겠다는 일종의 전투욕까지 생겼으므로, 훌리아가 있는 저녁 식사라고 해서 늘 정기적으로 행하던 루초 삼촌 댁 방문을 그만 둘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삼류 가십 뉴스나 써 보내고 이웃 나라에서 수입해 들여온 라디오 드라마나 각색해서 방송하던 판 아메리카나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볼리비아의 천재 드라마 작가 페드로 카마초가 영입되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 십개의 드라마 대본을-그것도 각자 다른 스토리-앉은 자리에서 뚝딱 써내고 자신이 쓴 대본을 직접 감독 하는 것도 모자라 연기, 음향까지 한 몸으로 해내는 이 외국인 작가를 보고 마리오는 엄청난 감동을 받는다. 물론 훌리아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그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아서 엄청난 구두쇠에 자기 세계에 묻혀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던 마리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작가에 대한 존경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언젠가 작가가 되어 살겠다는 어린 청년의 눈에는 페드로 카마초 말고 다른 사람이 진정한 작가로 인정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의문이 될 지경이었다. 겨우 에세이 한 편이나 소설집 하나 내고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며 세상을 누비는 다른 속물들보다, 자신의 예술이 라디오의 전파를 한 번 타고 없어지는 편이 더 어울린다며 끊임없이 글을 써대는 볼리비아 작가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글쟁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마리오의 페드로 카마초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지는 것과 비례하여(아니면 기하급수적으로?) 훌리아에 대한 사랑 역시 깊어졌다. 물론 열 네살이라는 엄청난 나이차와 엄마뻘, 혹은 엄마와 친한 이혼녀라는 사회적 핸디캡이 존재했지만 둘의 사랑은 어쩌면 그 핸디캡 때문에 더욱 스릴있고 애절한 것으로 돌변해 버렸다. 처음에 불장난같은 마음으로 시작된 연애놀이였건만 마리오는 훌리아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훌리아 역시 마리오를 특별한 애인처럼 대우한다. 이 어린 미성년자에게는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 사랑에 대한 독점욕도 탁월해서 훌리아가 다른 구혼자들과 저녁 데이트를 하기라도 하면 질투의 화신이 되었고 더욱 더 그녀를 자신만의 여자로 만드려고 애를 썼다. 자신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는 수많은 친척들의 눈을 피해 몰래 데이트를 계속하면서 행복한 한때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야 만다. 사실 집안 어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다 말겠지 하던 불장난이 심각해지자 둘을 떼어놓기 위해 미국에 있는 마리오의 부모에게 편지로 상세 상황을 전달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는 반쯤은 미쳐가지고 지금 당장 페루 리마로 오겠다는 전갈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성격이 격한 아버지는 마리오를 죽이든 훌리아를 죽이든 해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
마리오는 훌리아와 절대로 헤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결혼을 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집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였는데 그러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번째로 마리오가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라 혼인을 하려면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고 두번째로 훌리아가 이웃 나라에서 이혼을 했기 때문에 혼인 신고를 하려면 볼리비아에서 증빙하는 이혼증명서가 필요했으며 셋째로 만약 이것들이 구비된다 해도 둘을 혼인시켜줄 구청장 또는 이장과 증인 두 사람이 있어야 했다. 마리오의 부모가 도착하기 전에 혼인을 마무리짓고 이별은 불가하다는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두 사람은 페루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며칠 동안 가슴 졸이는데, 과연 둘은 어떻게 될까? 결혼을 할 수는 있을까?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결혼을 하고 문제가 전부 해결 되더라도 열 네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행복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어린 시절 자기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한 챕터에 걸러 각각 다른 단편들이 등장하는데 이 단편들은 천재 라디오 작가 페드로 카마초가 진행하고 있는 드라마라는 설정으로 총 열 편이 나누어져 있다. 천재 작가가 자신의 기억력에 무너져 평범한 미친놈으로 추락하는 와중에 각기 다른 열편의 등장인물들이 여기 저기 뒤섞여 버린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 번 죽었던 여자가 저기서 등장해 멀쩡히 살다가 또 죽고, 저기서 등장한 유능하고 저명한 의사가 여기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실제적 이야기와 작가가 꾸며낸 허구적 이야기들이 뒤섞여 문학적 묘미를 한껏 자기식으로 높인 그의 문학적 재능에 탄복할 사람은 탄복하고 즐길 사람은 그저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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