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심리는 지극히 이기적이라 어려울 때일수록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처지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힘들지만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나으니까 현재를 긍정하고 꿋꿋하게 견뎌내야지, 하는 거다. 그런 심리에서 기인해볼때, 만약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고 그래서 이 세상이 살만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사람, 신정아를 떠올려보면 엄청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국민의 지탄을 받았고 뜻하지 않게 21세기의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었던 그녀. 그녀의 목소리는 '사건'이 지난 4년 후에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힘이 되어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4001은 그녀의 수감번호다. 홀로 영등포 구치소에 남으면서 영원히 기억될만한 자신의 수감번호를 이 책의 제목으로 내건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책을 출간한 것부터가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자신이 힘들때 외면한 이 세상에 대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좋은 관계였던 사람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언론에 대한 반격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이용할대로 이용해놓고 마지막에 뒤통수를 쳤던 정부 고위관계자들에 대한 고발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을 노린 노이즈 마케팅을 이용한 돈벌이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등등. 어쩌면 다 맞는 말일수도 있고 다 틀린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책을 출간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잠깐 반짝 떴다가 다시 잠잠해진 걸 보면 그녀의 책에 고발된 소위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새삼 지금 와서-노무현 대통령도 자살로 언론에 진 이 마당에-그녀의 방식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녀가 겪어온 세상의 탄압과 그것에 맞선 방식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힘이 얼마나 큰 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 안에 든 힘이 얼마나 큰 것이기에 그녀는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기분을 이기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며 견딘 걸까, 앞으로 인생에 기대하는 또 다른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억울한 감정을 풀고 싶어서 지금까지 견뎌왔다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걸까. 그렇기 때문에 4001에 녹아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신정아 사건에 대해 전체적인 정황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미술관 아르바이트 생으로 입사하여 큐레이터가 된 파격적인 커리어의 소유자, 변양균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오랜 연인, 빚은 많지만 고급한 취향을 가진 명품족에 학력위조의 원조로 대한민국의 학력 사기 실태를 자진고발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정아이고 언론이 과도하게 흥미위주로 포장한 그녀의 모습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언론이 만들어낸 말은 큰 거짓말이 아니다. 그녀는 미술관 통역사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큐레이터로 정식 입사를 하게 되었고 변양균과는 비서실장이 되기 전부터 불륜이긴 했지만 사랑을 나눠온 사이였으며 명품을 즐겨 입었고 예일대 박사학위를 편법적 방식으로 땄다. 문제는 언론이 만들어 낸 엄청난 사기꾼이자 도덕적 관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라는 이미지이고 그런 그녀를 매몰시키려는 사회적 분위기였던 거다.
그녀는 자신이 겪어왔던 일을 제법 담담한 어조로, 더 이상 숨길것도 없다는 허심탄회한 어조로 찬찬히 풀어나간다. 학력위조의 문제에서부터 변양균 전 비서실장과의 관계, 큐레이터로 쌓아온 자신의 경력과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켜 나갔던 정황 속의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신정아가 무슨 말을 해도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시간들을 겪고 이제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글로 세상에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어느 정도가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이다. 그녀가 잘못했던 부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그녀의 잘못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관대함의 차이는 변할 수 있는 부분이고, 그녀는 그런 것을 조금 기대한 듯 싶다. 나는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의 지탄을 받을만큼 죽을 죄를 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이제 나를 그만 미워하고 조금은 용서해주고 조금만 더 편히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라는 말이 4001을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이다. 아무말도 못했던 그녀가 대단하지 않은 문장력으로 엄청난 분량의 책을 펴내게 되었던 그 심리는 바로 자신의 말을 하고 싶었고, 언론이나 사회에 판단되지 않은 순수한 자신의 말을 세상에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일테다. 아무도 자신의 편이 아닌 것 같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미래에 어떤 희망을 보고 기대를 갖고 힘든 시간을 견디며 자신의 말을 문장으로 치환해 나갔을 그녀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지치지 않는 힘이, 내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고 지지해 주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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