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황야의 이리

gowooni1 2011. 4. 19. 00:33

 

 

 

사우스 아프리카에서 온 나의 영어 회화 선생 헤이스터는 완벽한 영국식 발음을 소유하고 있는 여성인데, 클래식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발음이 아메리칸 잉글리쉬처럼 뭉개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그렇게 우아하게 다가오지 않을수도 없었다. 단박에 그녀의 영어에 반해버려서 can을 캔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칸이라고 발음하고 싶어질 정도였는데 그래야할만큼 결정적인 우리 사이의 동질성이라는 게 있었다. 대화 도중 우리는 공통적으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데미안을 인상깊게 읽은 반면 그녀는 황야의 이리를 인상 깊게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Steppenwolf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영영 그녀와 뭔가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 당신은 스테픈 울프를 읽었습니까? 나는 요즘 그것을 읽고 있습니다만, 내게 있어 여전히 가장 인상적인 헤세의 작품은 데미안 입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추천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 데미안은 사실 아직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스테픈울프를 추천합니다.' 어째서 스테픈 울프 같은 것을 읽었을 정도면서 데미안을 들어보지 않았다는 말이지? 우리 제도권 하에서 헤세를 처음 접할 때는 으레 데미안을 먼저 알게 될텐데. 하지만 사우스 아프리카의 제도권 하에서는 약간 히피적인 것이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기준에서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네, 나는 요즘 그것을 읽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해보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한국식의 정서로 표현하기에는 나의 영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하나의 소설이 갈등을 유발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정의와 악이 대립되어야 하고 그것이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나중에는 해소가 되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방정식이 성립해야 한다. 헤세의 작품 세계에 있어 정의는 선이고 그 반대는 절대적 악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은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이 세상의 모순을 인정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현상을 경험하지만 대체적으로 선에 충실하며 악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에는 선에 가까운 인간이 되어간다는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헤세는 선이 절대적으로 옳고 악이 절대적으로 나쁘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선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기라도 하는 듯 악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헤세의 결론은 선으로 치달았다는 일관성이 있다.

 

황야의 이리는 헤세의 초기 작품,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작품 세계에서 데미안과 같은 자기 성찰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를 거쳐 유리알 유희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같은 보다 거시적인 시각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헤세가 치열하게 겪어왔던 길의 모퉁이를 보여준다. 자기만의 확고한 우주를 만들어 나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했던 그런 단계 중의 하나가 악이라면, 황야의 이리는 절대적으로 그 악에 충실하고 그것을 긍정한다. 다른 헤세의 작품이, 결국은 선으로 회귀를 한다면 황야의 이리의 주인공이자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고 지칭하는 하리는 악으로의 회귀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오십 평생을 금욕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하리는 고급 콜걸의 사랑을 받고 지금껏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인생의 쾌락을 느끼는 데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것을 넘어 약을 먹고 환각작용의 힘을 입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누리는 압축된 시간의 축복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악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이며, 악을 악이라고 결론지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각자의 확고한 기준이며, 세상에서 유리된 개성을 가지고 세상에 융화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유머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독자의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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