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7년의 밤

gowooni1 2011. 4. 5. 00:52

 

 

 

 

소설은 우울하게 시작된다. 모든 설정이 우울하다. 사형수 아빠를 둔 주인공 서원은 늘 세상에서 버림받는다. 아버지 최현수가 보통 사형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7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살인마, 미치광이 최현수는 늘 모든 언론의 즐거운 기삿거리였고 때문에 서원은 최대의 희생자였다. 최현수로 말할 것 같으면, 왕년에 잘 나가던 야구선수였고 포수중의 포수, 가장 기대되는 유망주였으나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와 110키로가 넘는 엄청난 거구의 외모와 달리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중요한 시합이 있을 때마다 다가오는 심리적 압박감때문에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던 그는 보안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한 삶을 시작했다. 그랬던 그가 세령호의 세령댐을 관리하는 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미치광이 행각의 무대가 된 곳이다. 댐의 모든 수문을 한꺼번에 방류하여 마을 하나를 아예 통째로 수장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유명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서원은 항상 환영받지 못한다. 작은 아버지네 집에서 삼촌네 집으로 이모네 집으로 다시 작은 아버지네 집으로.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몇 달 머물지 못하고 쫓겨난다. 마지막으로 버림받았을 때는 어느 곳에도 돌아갈 곳이 없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고 어머니는 세령호 사건 때 시신의 흔적도 없이 죽어버렸다. 그나마 남은 친척들에게는 이사간 주소조차 받지 못한채 내쫓기고 말았으니 서원이 이 세상에 믿을만한 구석은 오직 아저씨 뿐이었다. 그때부터 서원은 아저씨와 함께 몇 년간 떠돌이 인생을 시작한다. 서원은 비단 친척들에게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배경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존재가 되어간다. 전학을 간 학교에는 어김없이 그가 최현수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은 또 다른 학교를 찾아보아야 했다. 수십 번의 전학 결과 그에게 남은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학교에는 다니지 않는 편이 현명하겠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내몰리면서 아저씨와 서원이 머물게 된곳은 땅끝 마을에 붙어 있는 등대마을이었다.

 

등대마을은 너무 땅끝이라서 그런가, 세상의 풍파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승환 아저씨와 서원은 처음으로 정착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해본다. 정착이라고 해봤자 등대마을 구석에 붙어있는 유일한 민박집에 1년 동안 장기거주를 하는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서원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드디어 세상이 나를 잊어주는구나, 놓아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저씨와 함께 바닷가 마을에 살면서 다이빙 기술도 익히고 약국에서 오랫동안 근무도 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 생활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다시 서원을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망각의 차원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 아버지를 세상은 기억하고 있었고 최현수의 아들은 늘 그 사건이 언론에 재연될때마다 주인공이 되었다. 최서원이라는 인간의 삶은 최현수라는 사형수가 사람들에게 다시 상기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조건이 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무리 어렸을 때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해도 세상의 칼끝에도 서있지 못하게 만든 최현수라는 존재가 좋을수 없었다. 세상을 원망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던 어느 날 사건은 일어난다.
 
세상이 모두 자신을 등졌을 때에도 절대 곁을 떠나지 않았던 승환 아저씨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서원 앞으로 이상한 물건들이 배달된다. 나이키 운동화와 유에스비. 유에스비에는 대필작가인 승환 아저씨가 썼을거라고 예상되는 소설이 들어있었다. 그가 썼을거라는 예상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첫째,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명으로 써있었고 둘째, 세령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내막을 알거나 조사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저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령호 사건은 서원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앗아간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고 그는 이 파일을 읽기 싫다. 어째서 아저씨는 죽을때까지 기억하기도 싫은 이 사건을 상세히 기억하는데 멈추지 않고 소설이라는 작품으로 완성시켰을까, 왜 이런 때 이게 자신에게 배달된 것일까, 왜 자신이 이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모든 것에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아저씨는 행방불명되어 돌아오지 않고 때맞춰 이 물건들이 자신에게 배달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만약 이 소설들을 읽지 않는다면 뭔가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서원은 하는 수 없이 아저씨가 쓴 소설의 처음을 읽기 시작한다. 승환아저씨가 쓴 원고는 7년 전 세령호 사건의 날로 곧장 이동하는 통로이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와 7년의 밤 주인공의 어조는 오버랩 된다. 비슷하다. 잊고 싶은 과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도,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것, 그런 상황들이 세상 보는 눈을 삐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일치한다. 그리고 나중에 오해를 풀고 세상과 화해를 한다는 점까지도 기승전결의 구조는 대략 통한다. 엄청난 취재와 복잡다단한 플롯을 구상했을 것이 쉽게 예상되는 스토리 전개, 약간 지루하고 장황하지만 세세한 것 하나하나 눈에 그려지는 상황 묘사는 정유정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부지런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히 허황된 스토리에 살을 붙이고 호흡을 불어넣는 작가의 열정은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겉으로 보기에는 짤막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서사를 구축한다는 점으로 비춰지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의 자의식에서 벗어나 오로지 이야기꾼으로 스스로를 매김하려는 스토리텔러로서의 프로정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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