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제주-3

gowooni1 2011. 4. 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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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오늘은 하루종일 운전을 해야 하므로 전날 적당히 술을 마셨다. 덕분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우리가 머무는 펜션은 제일 큰 가족방이라 한 사람만 침대에서 자고 나머지 세 명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뒹굴며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방에 깔려있는 이불 중 가운데서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아직 세 명은 정신없이 잠 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제주도의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며 고요를 느끼고 싶은 욕구와 괜히 일어나서 아이들의 잠을 조금이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이를 오가며 몇 분 더 이불 안에 누워 있었다. 욕구가 승리했고 나는 가능한 한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다. 펜션 입구에서 나오자마자 제주도 남쪽 바다 수평선이 멀리 비치고 태양은 벌써 상당히 높은 고도에 올라 화창한 봄 날을 미리 보여주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스트레칭을 하며 다리 근육과 어깨 근육을 풀어주고 허리를 비틀어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었다.


어제 밤 저녁을 먹는데 약간의 사건이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맥주와 섞어 마시던 혜진이가 좀 취했다. 취하는 거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한 토론을 좋아하는 혜진이 이번에도 또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나왔고 그것에 대처하는 나머지 세명의 자세였다. 이번에 그 애의 화두는 결혼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결혼을 해야는 하겠는데 결혼을 하기 싫은 자신의 마음. 하지만 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처녀로 치부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결국은 어쩔수 없이 자신도 결혼을 해서 미덥잖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그 애를 짜증나게 한 모양이다.

 

만약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확고해서 남들의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찬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럴만큼 뜨거운 열정이 없는 사람은 자신 역시 자신의 엄마가 살아가는 미적지근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하고 스스로의 개척의지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게 알게 모르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었고, 혜진이는 그 굴레에서 자신이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그렇게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애의 방식이었으므로 무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애가 벌이는 논쟁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동조인지도 몰랐다. 혜인이와 은혜는 그런 화두에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지나자 점점 식탁에서 멀어졌고, 나에겐 그런 생각에 동조를 해 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다소 시니컬하게 반응을 했다. 동조는 커녕 너는 어째서 어쩔수 없다고만 생각을 하느냐고 논쟁을 각오하고 개인적 의견을 타진하기 시작할 때쯤, 자신이 힘들게 선택한 체념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나의 언사가 야속한 듯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한숨자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상황은 리셋되었다.

 

아침은 라면으로 떼우고 나는 오늘 들러야 할 곳의 여정을 짜느라 지도를 들여다 보며 재빠르게 동선을 탐색했다. 처음으로 들러야 할 곳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으로 정했다. 어제 천제연 폭포를 들러 돌아다니면서 건물 전체가 유리로 포장되어 있는 여미지 식물원을 보고 다 같이 가보기로 하기도 했다. 삼 키로 남짓 떨어진 식물원에 도착해서 남쪽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높은 야자수들, 건물 앞에 켜져 있는 분수와 그 둘레로 예쁘게 피어 있는 노랑, 보라 색 꽃들, 빛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는 수면을 렌즈에 담았다. 전날 활짝 피어있던 혜진이의 표정에 힘든 기색이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나는 아직 그 애의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간파했다. 그 애는 식물원을 돌아다니던 한 시간 남짓 한 시간에 힘을 내어 우리의 동선에 맞춰 이동했고 사진을 찍었고 추억의 일부로 자리매김 한 다음, 다음 코스인 대포 주상절리에서 한 타임 쉬었다.


여미지 식물원은 건물 안에는 각각 주제별로 만들어진 방이 동그란 건물 가에 빙 둘러 있었고 첫번째 방부터 시계방향으로 돌며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아름다웠던 건 첫번째 꽃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식물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묵묵함과 지독하게 정적으로 흘러가는 시간보다 그들의 성향과는 다르지만 절정이기도 한 한시적인 아름다움을 열심히 발산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 그런 외부적 화려함에 훨씬 매료되는 보잘것 없는 인품의 소유자인 나는 그 방을 보고 난 다음 다른 방에서는 그만큼의 흥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식물들의 특이한 발육 특성을 보는 것과 다른 나라 문학에서만 듣던 식물들- 예를 들어 바오밥 나무라던가 파피루스 같은-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라틴어가 기원일 것 같은 학명이 붙은 식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건물 바깥에 있는 널따란 잔디밭과 정원들에는 인물 사진이 예쁘게 나올 적당히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어 우리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여미지 식물원 정원에서 찍은 사진들이 제일 잘 나온 사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상절리는,  제주도를 처음 와보는 애들에게 섬이 가지고 있는 특색있는 지형을 보여주어야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나 역시 한 번 더 들러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반짝거리는 그 눈부심을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에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들른 장소였다. 아까 말한대로 혜진이는 차에서 잤고 남은 우리 셋만 입장했다. 아쉬운 건 칠년 전에 왔을 때는 주상절리 아래 암벽들이 낮게 깔려 바다와 가까운 곳까지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들어갈 수 있는데 사람들의 도덕성이 높아져 들어갈 생각을 안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금지를 해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문 관광 단지 내에 있는 국제 컨벤션 센터 1층의 내국인 면세점에 들렀다. 살 만한 화장품이 있을까하고 들렀는데 사려고 마음먹었던 브랜드들은 아예 입점도 되지 않았다. 혜인이만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면세점 앞에 있는 던킨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들고 차에 올라타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벌써 시간이 12시 반을 넘고 있어서 가는 도중에 맛있는 식당이 보이면 들러 점심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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