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르뇨 1870, 살로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성 '살로메'의 어원은 히브리어의 '살롬'인데 이는 평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성을 가진 여자들은 전혀 평화롭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의붓 아버지인 헤롯왕 앞에서 넋을 빼놓을 만큼 황홀한 춤을 춘 살로메는 왕에게 '그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 주겠다'고 만인들 앞에서 약조를 했는데, 요염한 살로메의 요구는 공주다운 바람, 아름다운 옷이나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왕에게 요구한 것은 경악스럽게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였고, 그 즉시 은빛 쟁반에 아직 피가 채 식지 않아 뜨끈뜨근한 요한의 머리가 날라 왔다. 기원 1세기 유대의 일이다.
그로부터 약 1900여년이 지난 어느 추운 겨울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독일에서 건너온 러시아 군인 구스타프 폰 살로메 장군의 막내 딸로 태어난 루는, 위로는 반 다스보다 하나 부족한 오빠들이 줄줄이 있던 차에 환갑이 다 되어가는 장군의 외동 딸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며 성장했다. 딸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기에도 남은 인생이 부족했던 장군은 루를 응석받이로 키웠는데 거기에다가 오빠들만 있는 집의 막내 여동생이라는 위치는 루에게 있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자세를 만드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녀에게 있어 또래 여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란 시시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의 관심사와 루의 관심사는 애초에 근본부터가 달랐다. 여자 아이들은 멋진 남자와의 연애 사건이나 수 놓기, 무도회, 사교계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런 건 남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사상과 함께 성장한 루에게 흥미를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보다 루는 철학과 신학과 문학의 신봉자였다. 루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는 물론 고전 철학까지 심도 있게 공부를 했고 반면으로는 절실한 러시아 정교 가문의 딸 답게 독실한 신자로서 하느님과 기독교를 숭상했다.
그런 열일곱 살의 루에게 학문의 눈을 활짝 틔게 해줄 사람이 등장했다. 보수적인 러시아 고위 귀족들은 그의 새로운 설교 방식을 싫어 했지만 루에게 길로트 목사는 자신을 더욱 신실한 신자로 만들어 주고 더 많은 세계를 보여줄 사람으로 비쳤다. 루는 마치 하나님을 신봉하는듯 한 자세로 길로트를 따랐고, 길로트는 총기와 순진함과 교태가 교묘하게 어우러진, 자신보다 거의 스무 살이나 어린 이 소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들의 진한 정신적 유대는 길로트 목사가 루에게 자신의 아내가 되어 달라는 고백을 할 때 까지만 이어졌다. 길로트를 남자인지 하나님인지 우상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푹 빠졌던 루에게 목사의 세속적인 고백은 그녀 안에서 하나의 신을 붕괴시키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하나의 시작에 불과했다. 애초에 철학과 신학이 논리적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 한 지성적 인간의 뇌에서 융합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그 전부터 루는 신앙을 조금씩 잃었다. 또 길로트 목사의 고백은 그 이후로 루를 스쳐 지나간 수 많은 남자들과의 일에 비하면 차라리 사건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앙과 함께 하나님과 정신적 지주를 잃은 루는 보다 자신다운 삶을 찾기 위해 스위스 취리히로 떠나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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