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어둠 속의 남자

gowooni1 2011. 3. 19. 11:42

 

 

 

 

일흔 두 살을 먹은 한 남자가 어둠 속에 앉아 있다. 이미 세상을 살 만큼 살아온 그는 거동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활동적인 정신 때문에 쉽게 잠을 들지 못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괴로운 기억들은 시도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 그를 당시의 감정으로 몰아넣는데 그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잠도 오지 않는데 좋지도 않은 감정에 휩싸이기 싫은 노인은 자구책을 마련한다. 어둠 속에서 앉아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하나 진행시키는 것이다. 오언 브릭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이라크 전이 아닌 미국 내전이 일어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든 다음 두 개를 합친다. 이 세상에 살던 브릭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노인이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미국이라는 세상에서 어리둥절한 상황으로부터 노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노인은 집중력이 가끔 흐트러진다.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배가 고프다던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다든가. 혹은 바깥에서 나는 엄청난 바람 소리 때문에. 그러면 노인의 머리 속에선 이쪽 세상에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두 여자들-딸과 손녀-에 대해 생각을 하는가 하면 몇 년 전에 죽은 아내 소니아에 대한 회상. 딸 미리엄에게 한 때 있었던 남편과 손녀 카티아의 남자친구였던 타이거스에 대한 회상. 일흔 두 해 동안 노인이 살아오면서 만나고 겪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 이 모든 요소들이 노인이라는 매개를 중심으로 하여 두서도 없이 죽죽 이어진다.

 

노인은 어둠 속에 앉아서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모든 기억들을 동원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진행시키지만, 그 이야기를 쫓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간혹 혼란에 빠질 경우가 생긴다. 지극히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노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그가 상상해 낸 가상의 이야기였던지 아니면 진짜 살아왔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지 헷갈린다. 혹은 그가 겪은 삶이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 가지 않는다. 72년 된 인간의 몸뚱이에는 많은 것들이 축적되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 많은 고유 명사들과 각각에 속해 있는 또 다른 스토리가 가지치듯 전개 된다. 이미 인간의 정신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 진짜 세상의 것인지 상상의 세계 것인지 구분을 하려는 것이 가끔 무의미해 보일 때도 생기고 만다.

 

그래도 노인이 말하는 이야기들에 큰 줄기는 두 개 정도다. 하나는 자신이 창조한 오언 브릭의 세계,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거기에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아내 소니아에 대한 기억. 노인은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자기가 만들 놓은 브릭의 세상에 결국 싫증을 느끼고 브릭을 죽임으로서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하지만 소니아에 대한 기억은 그가 끝내고 싶다고 멋대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 만들어 내야할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인 것이다. 밤에 잠을 못 이룬 손녀딸 카티아가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와 대화를 나누면서 노인과 소니아의 이야기는 점점 더 선명한 색을 칠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니아와 함께 했던 인생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후회로 점철된다. 18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온 아내를 배반하고 생기발랄한 정부에게 가 버림으로서 소니아와 미리엄에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었던 자신에 대한 가책. 9년 간 함께 살던 두번째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유럽으로 달아나버린데에 대한 아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소니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이전 오스터의 작품 속에 흔히 등장하는, 남자 인물들이 세상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이 노인에게도 투영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한 애정과 끔찍한 혐오. 안락하고 평온한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키우는 삶을 살고 싶으면서도 말이 잘 통하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큼 아름다운 정부까지 자신의 인생 일부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 평범한 삶을 죽도록 그리워하면서도 자아 발견을 위한 삶을 위해 나아갈 것임을 아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모순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음에 대한 회의.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갖고 나면 머지않아 공허감을 느끼고 마는 끊임없는 욕망에 대한 자책. 오스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할 때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면모이지만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향일 것이다. 그 정도에 따른 차이가 각자 있을 것이라는 게 유일한 희망이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분  (0) 2011.03.31
인형의 집-헨릭 입센  (0) 2011.03.26
데이지의 인생  (0) 2011.03.19
살인자의 건강법  (0) 2011.03.12
달의 궁전 Moon Palace  (0) 2011.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