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네 살의 아름다운 베로니카는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여성이다. 고급 교육을 받았고 미모도 괜찮고 길거리를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보이면 유혹할만큼 매력도 있고 도서관 사서라는 안정된 직장도 있다.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간단한 정신병을 앓아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죽기로 결심을 했다. 미래가 너무 빤히 보이는 삶은, 어떤 식으로 살다가 죽을지 훤히 알겠는 인생은 시간을 유예한 죽음이나 별달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당장 능동적으로 죽는 편이 조금씩 시간을 소진해가며 죽는 수동적 죽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적어도 무료함과 무한반복이라는 인생의 최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얻은 수면제 네 통을 한 알 두알 꾸역꾸역 삼키고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다음에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차리게 된다면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기를 바라며.
그러니까 베로니카의 의도를 고려했을 시에는 재수에 옴붙은 격이겠지만 남들의 시각으로 봤을 땐 기적적으로 그녀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행인 한 번 지나간 적이 없는 베로니카의 방에 마침 들렀을 거라고 추측하는 손님이 쓰러져있는 베로니카를 발견하고는 급히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다량으로 몸에 흡수된 수면제 때문에 삼 주 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베로니카는 자신의 의도대로 죽지 않은 것이 천만 유감이었다. 더 유감인 현실은 그녀가 깨어난 병원이 일반 병원이 아닌 유명한 정신병원이었다는 사실이고 더더욱 유감인 사실은 결국 그녀는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즉, 그녀의 시도는 완전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일주일 후에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 죽게 될 거라는 고약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한 번에 죽어버리는 편이 누가 보아도 더 나았다.
의도치 않게 일이 돌아가는 바람에 자살기도를 했다는 과거외에는 정신 병력이 없는 정상인 베로니카는 정신병자들이 정상인으로 취급받는 병동에서 일주일을 지내게 된다. 소문은 빠르게 돌아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베로니카가 일주일 후에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병자들에겐 그런 문제쯤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모두들 천천히 시간을 소진시켜가며 죽음을 향해가는 판국에 베로니카가 일주일 후에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될 거라는 건 동정의 가치도 느끼지 못할 문제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상인인 베로니카를 비웃으며, 자신들의 세계에 속하지도 못하고 외부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너무나 정상적인 베로니카는 자신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너무 상해 있지만, 한 친구는 그녀에게 말한다. 왜 너는 그들이 비웃는데 자존심이 상해하는 거지? 어차피 너는 일주일 후에 죽을거고 너가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한다고 해도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데, 너의 자존심은 대체 무엇을 위한 자존심이지? 남들이 보기에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알량한 자존심인가? 남들이 보는 너 따위는 당장에 집어치우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 이곳은 그런 행동이 허용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베로니카는 자신들을 비웃은 클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한창 할아버지 뻘인 우두머리의 뺨을 한대 힘차게 갈긴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니, 넌 어차피 일주일 후엔 없는 사람일테니까.
베로니카는 서서히 찾아오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 정신병동 빌레트에서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단 한번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있는지, 진정한 해방감을 느끼며 살아본 적이 있는지 자문하면서 역시 지금껏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 없는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 당연히 그녀는 당황스럽다. 겨우 자신의 소원대로 죽을 수 있게 된 이 시점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후회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든다. 애써 그런 감정을 부정하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아하려고 하지만 또 하나의 우주가 그녀의 삶에 자리를 차지하게 시작한다. 정신분열증 환자 에두아르가 그녀의 마음 속에 점점 크게 들어온 것이다.
에두아르 덕분에 베로니카는 죽음을 기다리는 하루하루, 일분 일초의 시간을 아끼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 만약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십 사시간 뿐이라면, 자신이 죽을 장소를 선택하는데 그 시간을 사용할 것이 아니고 그의 얼굴을 보는데 사용하겠다고 결심하는데 이른다. 에두아르가 자신의 피아노를 좋아한다면 그가 인생에 대한 희열을 느끼도록 피아노 연주를 해주고 싶다. 그런 베로니카의 마음이 전달이 되었는지 정신분열증 환자이고 그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에두아르는 베로니카와 함께 빌레트를 탈출한다. 베로니카의 마지막 하루를 그녀가 하고 싶은대로 살게끔 해주려는 에두아르. 그들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광장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단 한 번 등장한다. 그는 이미 십대 시절 세 차례의 자살시도 끝에 정신병동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한 번은 써보겠다고 늘 생각해왔고 그 결과가 바로 베로니카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이란다. 정신병동의 비인간적인 실상에 대해 고발하겠다는 의도가 첫번째는 아니고,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어째서 인간은 모든 것을 내팽개친채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지 못하냐고, 왜 그렇게 남들 보기에 괜찮은 인생을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냐고, 늘 그가 작품을 통해 하는 주장들과 다소 일맥상통한 주제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일주일 후에 죽으나 일년 후에 죽으나 십년 뒤에 죽으나 죽으면 같은 인생이라면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가 유유히 흐르는 소설이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앙테크리스타 (0) | 2011.02.22 |
---|---|
아담도 이브도 없는 (0) | 2011.02.16 |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0) | 2011.02.01 |
단순한 열정 (0) | 2011.01.28 |
슬픈 예감 (0) | 2011.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