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아담도 이브도 없는

gowooni1 2011. 2. 16. 21:22

 

 

 

1989년, 22살의 아멜리는 일본으로 돌아온다. 벨기에 인의 피가 흐르고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아멜리는 일본에서 태어나 5살때까지 자랐으니, 일본으로 온 건 고향으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섯 살 짜리 일본어밖에 구사할 줄 몰랐고, 가장 빠르게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일본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슈퍼마켓 게시판에 '프랑스어 과외, 흥미로운 가격' 이라고 붙여 놓은 쪽지에 한 청년이 걸려들었고 둘은 오모테산도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로 연락처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무턱대고 나간 카페에서 청년은 한 눈에 아멜리를 알아본다. 스물 한 살의 청년은 아멜리보다 고작 한 살 아래였다. 그래도 그는 제자였고 아멜리가 선생이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이끌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처음으로 탐색하는 과정에 진입한다. 아멜리는 청년의 프랑스 어 수준을, 청년은 아멜리의 일본어 수준을. 프랑스 어 학과 3학년인 청년 린리는 한심할 정도의 프랑스 어를 구사했고 아멜리는 일본의 비효율적인 외국어 교육 현실에 다시 한 번 경악한다. 자신의 실력이 들통나 부끄러운 린리는 반대로 아멜리가 다섯 살 짜리 일본어를 구사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다. 교습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들의 탐색전에 대해 청년은 얼마의 수업료를 원하느냐고 묻고 아멜리는 거절한다. 하지만 청년은 그녀 앞으로 하얀 봉투를 내밀고, 커피 값을 치르고, 다음에 만날 약속을 정한 다음 헤어진다. 아멜리는 자신이 수업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봉투 안에 든 육천 엔을 보고는 신이 나서 사과 여섯알을 사먹는 데 써버린다.

 

둘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며 친해진다. 그래서 세번째 만났을 때 즈음에는 린리도 자신의 선생에 대한 경외감보다 친구를 대하는 친근함을 더 표시한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눌수록 외국어 실력은 늘게 되니까, 아멜리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청년이 다음에 만날 때에는 늘 만나던 카페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녀의 집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을때 아멜리는 좋다고 답한다. 다음 주 교습 날, 린리는 윤이 나는 하얀 벤츠를 몰고 아멜리의 집 앞으로 나타나고 어디로 가느냐고 그녀가 묻는 질문에 자신의 집으로 간다고 답한다. 순간 아멜리는 이런 경우 없는 남자를 다 봤나 싶어 속으로 또 한 번 경악하지만 혹시 린리가 야쿠자의 두목이나 그 아들 쯤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린리의 집으로 향한다. 린리의 집은 일본의 부호들이 사는 동네에 철통 방호가 되어있는 콘크리트 성이었는데 그의 하얀 벤츠를 탐지하자 저절로 열리는 주차장까지 겸비한 완벽한 성이었다.

 

그녀를 환대하는 린리의 아버지와 그녀에게 철저히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아멜리는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외국 여자로서, 그리고 린리의 외국어 교습 선생으로서의 자세를 유지한다. 그 집에 들어가 확인한 것은 린리의 가족이 야쿠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과 일본의 전통에 따라 노망든 조부모를 함께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외국 여자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였는데 그때 까지만 해도 아멜리에게 그런 것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린리는 아멜리에게 있어 아직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린리가 아멜리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시간과 그에 비례하여 비중이 커졌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린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외국 여자에게 보석을 세공해 선물했지만 자신의 남편과 아들의 마음을 빼앗아간 어머니의 적대감을 확실히 느껴야만 했으며, 자신은 '코이'를 느낄 뿐인데 린리의 '아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멜리가 린리에게 느끼는 코이란, 일종의 애정이었다. 같은 취미와 취향과 흥미를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 그게 바로 아멜리의 린리였다. 애틋하거나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랑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감정. 아멜리는 린리를 좋아했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와 떨어져 있으면 금방 그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일에 열중해버리고 말았다. 반대로 린리가 아멜리에게 느끼는 감정은 명백히 '아이', 사랑이었다. 린리는 일편단심 아멜리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그녀를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고심하는 남자였다. 그런 린리의 감정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남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아멜리의 입장에서 린리의 마음에 상처를 줘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린리가 아멜리에게 청혼을 했을 때, 약혼이라는 훌륭한 중간 단계의 사회적 단어를 이용하여 그와의 관계를 유보할 수 있었다.

 

아담도 이브도 없는,은 아멜리의 자전적 소설로 실제 이야기 안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벨기에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곳곳에서 살았는데 일본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었고 늘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스물 두 살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그녀가 일본에 돌아와서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린리와의 사랑을 담보로 한 우정을 그리고 있다. 사랑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이 직접적이지 않은 나라 일본에만 존재하는 코이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린리에게 느꼈던 감정을 보다 정확히 표현 할 수 있었던 아멜리는, 어째서 자신이 린리에게 '아이'를 느끼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선과 마찬가지로 악에 매료되는 아멜리는 선만 존재하는 린리에게 동족 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만 본질적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발전시킬 수 없던 것이다. 너에게는 악이 없어, 라고 말하는 아멜리의 말에 그게 나빠?라고 되묻는 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헤어질 수 있었기에 애틋하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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