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슬픈 예감

gowooni1 2011. 1. 23. 12:29

 

 

 

 

이상하게도 야요이에게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그 이전 시간은 송두리째 사라진것처럼. 이것은 늘 야요이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자라온 남모를 고민이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고 해서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번듯한 중산층 가정에서 밝은 성격의 아버지와 중심이 흔들림없는 어머니, 듬직한 동생 데츠오와 함꼐 살아가는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만족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야요이도 그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노력을 해야만 했다는 건 자연스럽지만은 않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런 삶 사이에 유일하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이모였다. 이모는 항상 유별나서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짙은 녹색덤불이 가득해서 어두컴컴하고 폐허같은 무덤같은 집에서, 자신이 생활하는 곳 이외에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사는 이모. 그녀에게는 일정한 규율이라던가 반듯하고 조화스러운 삶의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내키는대로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고등학교 음악 선생이라는 반듯해야 하는 직업에 있어서도 이모는 반듯한 선생이 아니었다. 그런 이모를 다들 걱정했지만, 야요이만큼은 그런 이모의 심리가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누군지 몰라 당황스럽고 답답할 때 가출해서 갈만한 곳은 그 무덤같지만 너무나 편한 이모집 뿐이었다.

 

입시에서 떨어지고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 야요이에게 또 한 번 답답증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출을 단행했고, 목적지는 한결같이 자신을 받아주는 이모 집이었다. 늘 같은 가출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자신이 누군지,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진짜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느낌 같은 것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출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예전과는 다른 자신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왔다. 그런 예감은 야요이만 든 게 아닌 모양이어서, 이모도 예전과는 다르게 야요이를 대했고, 집에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딸 때문에 돌아오라는 전화가 종종 왔다. 그리고, 항상 자신만의 인생을 즐겁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남동생 데츠오에게서도 전화가 오고 말았다.

 

일정한 생활패턴이라는  것이 없던 이모와, 새벽 두 시에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중에 걸려온 데츠오의 전화로, 둘 사이 혹은 셋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그 아이, 너를 좋아하는 모양이로구나. 누구? 방금 그 아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동생. 여기서 야요이는 자신의 예감을 믿고 질문을 과감히 밀어붙인다. 우리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모는 야요이의 친언니였다는 말이고, 친동생이라고 믿었던 데츠오는 남남이었다는 뜻이다. 1988년, 요시모토 바나나의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지 많이 다듬어진 최근 작품들과는 달리 신선함이 있기도 하지만, 알고보니 사랑해도 윤리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것마저도 신선하다. 늘 금기된 사랑을 쓴 작가도 처음에는 금기된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나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도 신선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자신이 야요이와 친자매라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밝히고 난 다음날, 이번에는 이모가 가출을 한다. 야요이는 이번에도 직감으로 안다. 이모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자신이 찾아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데츠오와 함께 이모를 찾는 짧은 여행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 지금의 가족과 자주 놀러갔던 가루이자와의 별장에서부터 아오모리까지. 가루이자와에 있는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발이 늦었다. 이모의 쪽지를 발견하고 허탈해하는 야요이와 데츠오에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든다. 이모의 옛 애인이자 제자였던 남자.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단서를 남기지 않는 이모를 늘 궁금하게 여겼던 야요이에게도 조금씩 이모, 아니 언니에 대한 생활을 조금은 알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그런 짧은 여행으로 언니에 대해 알아가고, 데츠오와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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