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gowooni1 2011. 2. 1. 00:03

 

 

 

평생 한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 그 길에 있어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숭고한 고집이라는 관점에서는 멋있어 보이지만 융통성이 없어 보일땐 영락없는 외곬이다. 위대한 달링턴 가의 집사로 일평생을 살아온 스티븐스는 집사 중에서도 최고의, 일류의 집사임에는 틀림 없다. 사리 분별이 명확하고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지을 줄 알며 수 십명의 직원들을 다루는 데에도 정통하고 주인이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있어도 귀를 막을 줄 안다. 하지만 너무나 멋진 일류 집사가 되어버린 나머지 유머 감각도 없고 연애 감각도 좀 부족한 꽉 막힌 사람마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살아오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새로 바뀐 달링턴 홀의 주인 패러데이 씨는 미국 신사라서, 그가 종종 스티븐스에게 농담을 걸어왔다.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스티븐스의 요즘 최대 고민은 그래서, 일류 집사로서 평생을 살아온 자신에게 유머라는 새로운 감각이 요구된다면 그것을 연마해봐야 겠다는 생각이다.

 

신흥 대국의 신사인 패러데이 씨는 늘 고풍스러운 영국식 저택을 소유하고 싶어했고, 마침 작고한 달링턴 경의 유서깊은 저택 달링턴 홀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아무리 큰 저택이라도 쓸데없이 많은 직원들을 둘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기야 옛날과 달리 전기와 수도와 가스 덕분에 무엇이든 자동으로 손쉽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괜히 많은 사람을 들여봤자 낭비일 뿐이었다. 한창 달링턴 홀이 잘 나가던 때에는 수십 명의 직원이 필요했지만 요새에는 네다섯 명 정도의 인원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유서깊은 저택에는 그에 상응하는 최고급 집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새 주인 덕분에 스티븐스는 일종의 '패키지'가 되어 달링턴 홀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최고급 일류 집사의 자질 중 하나는 진정한 충성을 바칠 만한 인품이 되는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있지만, 스티븐스가 충성을 다 했던 옛 주인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고 또 이 새로운 주인도 지내고 보니 존경할만한 사람이라는 판단도 들었다. 게다가 패러데이 경은 미국 신사답게 호탕하고 개방적이어서 늘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스티븐스에게 자신의 포드 차로 일주일 간 여행을 하고 오라고 제안까지 했다.

 

주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그저 좋았을텐데, 일류 집사 스티븐스는 이 여행에는 일종의 집무적 목적이 있어야, 자신이 생각하는 집사의 품위에 어긋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마침 최근에 받은 편지 덕분에 아주 적절한 목적까지 떠올랐다. 스티븐스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이 적은 수의 직원으로 달링턴 홀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문제가 있었고, 유능한 직원 한 명만 추가 되어도 현재 당면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 유능한 직원에는 최근 편지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언급하고 있었던 켄턴 양이 가장 적절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스티븐스는, 옛 달링턴 홀의 최전성기때 총무 일을 매우 훌륭하고 빈틈없이 해냈던 켄턴 양만 다시 돌아온다면 현재 이 저택이 가지고 있는 인력관리 문제의 많은 부분들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고, 그래서 주인이 다시 한 번 여행을 제안했을 때 켄턴 양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왕좌왕 설명을 해도 미국 신사인 유쾌한 패러데이 경은 한 번에 파악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네는 옛 여자친구를 데려오겠다는 건가?'

 

그렇게 평생을 달링턴 홀에서 지내온 스티븐스는 최고급 포드를 끌고 6일 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집사로서 집 이외의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스티븐스는 여행이 시작되고 점점 처음 보는 길로 접어들면서 자신이 수십년 동안 한 곳에만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혼자 자동차를 몰고 긴 시간을 운전한다는 것은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닌 그에게는 그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늘 주인의 서재에서 보아왔던 책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의 명소들을 들르고 저녁이 되면 마을의 조촐한 여관에 들러 휴식을 취하는 여행을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최근에 도착한 켄턴 양의 편지에 대해 수도없이 복기 하는데, 사실, 켄턴 양의 편지에는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한 언급만 있었을 뿐 다시 달링턴 홀로 돌아오고 싶다는 언질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스티븐스가 수도 없이 읽고 면밀히 살펴본 결과 달링턴 홀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침 결혼 생활도 파국에 이른 것 같으니 별 갈 곳이 없다면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 업무를 보도록 제안을 하겠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켄턴 양이 분명 자신의 제안을 은연 중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고 또 믿고 싶었다.

 

여행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 하는 이 6일간의 짧은 일정이, 지난 집사로서 지낸 수십 년간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는 늘 켄턴 양과의 추억이 겹친다. 자신이 이제 막 최고의 집사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을 무렵, 집사보다 한 단계 낮은 총무로 들어온 켄턴 양은 당시에 늘 스티븐스와 부딪히는 사이였다. 업무적인 것에 프라이드가 강했던 두 사람은 항상 의견이 충돌했다. 서로 불필요한 언쟁을 줄이기 위해 꼭 전달해야 할 사항만 메모를 남기던 시절에서부터 하루 일과가 끝나고 켄턴 양의 집무실에서 두어 시간 코코아를 마시면서 회담을 하던 시절까지 그렇게 수 년간 그들은 함께 전성기의 달링턴 홀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켄턴 양을 생각하면 자신이 지난 시절 개인적 삶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직 집사로서의 삶에 전부를 건 자신이 떠오를 뿐이었다. 오직 최고의 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 아래 켄턴 양의 호의도 거절하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청혼을 받은 켄턴 양에게 그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떠나 보냈던 자신이었다.

 

존경할만한 주인을 직접 마음으로 정해 충성을 다했고, 집사로서의 품위와 사명을 지키고 완수하기 위해 살아왔던 스티븐스가 이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인생의 시점에서 다시 켄턴 양을 만나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지. 여전히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독백에서조차도 솔직하지 못한 그인데 말이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집사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긍정한다.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야 하는 일류 집사라면 자신에게 부과된 또 다른 사명, 유머 감각을 반드시 키워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새 주인이 다음 달에 도착해 자신에게 유머를 던지면 멋지게 응수해 주인을 놀래켜 드리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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